항목 ID | GC01400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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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鷲棲祠 |
영어음역 | Chwiseosa |
영어의미역 | Chwiseo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취서산록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현오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취서산에 있는 사당.
[개설]
취서사는 김유신(金庾信)의 조부인 김무력(金武力)과 아버지인 김서현(金舒玄)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변천]
취서사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취서사창건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취서사는 양산시 하북면 취서산(鷲棲山) 기슭에에 있다. 가락국 왕자 신라 각간 휘 무력공(武力公)의 무덤은 동원(東原)에 있고, 신라 뇌양주도독 양주총관(賂良州都督 良州摠管) 휘 서현공(舒玄公)의 무덤은 북원(北原)에 있는데, 이 사(祠)는 양공(兩公)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이다.
휘 무력공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제2왕자이시고, 휘 서현공은 무력공의 맏아들이시며, 신라 삼국통일의 영걸(英傑) 흥무대왕(興武大王)의 고(考)이시고, 신라 태종 무열왕 비 문명왕후(文明王后)의 부(父)요, 모(母)는 법흥왕비(法興王妃) 파도부인(巴刀夫人)의 매씨(妹氏)인 부인 박씨요, 배(配) 만명부인(萬明夫人) 김씨는 신라 종실 숙흘종녀(肅訖宗女)이시다.
우리 동방(東方)이 하늘을 연 후 천손(天孫)이 강림하여 나라를 세웠으니 가락국(駕洛國)이라. 시조대왕(휘 수로)으로부터 10대 10왕으로 500년간의 찬란한 문화 유적을 보유하고, 사직을 수호하면서 성군이 치국(治國)하니 국세는 융성하고 백성은 평온하여 태평성세였으므로 군신은 현적(賢績)과 생업에 매진하였으니 동방의 천국이요, 지상의 중화(中華)였다.
억조창생이 성군을 받들고 호국에 진력했으나 나라의 명이 다하려고 병화가 끊이지 않고, 유군신주가지우(有君臣冑迦之憂)하며, 모침(謀侵)을 극복하지 못하였으니 죄 없이 당하는 백성의 참상을 왕은 한탄하다가 인류 창생의 대천리(大天理)에 순응하여 10대 구형왕이 나라를 신라에 양여하고, 왕은 지품천현(知品川縣[산청]의 왕산(王山) 아래 수정궁(水晶宮)에 은거하면서 세 왕자를 신라로 귀화케 하니 구형왕 12년 임자 신라 법흥왕 19년 서기 532년이다.
이로써 가락국 500년의 찬란하던 철기 농경 문화와 종묘사직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문화와 역사가 태동하게 되어 그 후예들은 일근만지(一根萬枝)로 세계 도처에 김해 김·허(金海 金·許)가 존재 않는 곳이 없고, 인류 생존 봉사에 기여함이 창공에 외연(巍然)하니 어찌 가락의 후예됨을 긍지로 삼지 않으리오.
또 10대 10왕은 가락국이나 추존일왕(追尊一王)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한 휘 유신 태대각간인 흥무대왕이시니 이는 우리 동방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추존이며, 사우에 봉안한 신위는 대왕의 고(考) 및 조고(祖考) 양위분인데, 대왕의 삼국통일 대업 성취의 기반 구축은 대왕의 부조(父祖) 양위분께서 그 기초를 달성한 공적이 위대하기 때문에 여기에 봉안하게 된 것이다.
찬란하던 가락 문화는 오늘날의 과학 문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철기 농경 문화로서 당시 동방의 어떤 문화도 추종을 불허하였으나 외침이 날로 강하여 진군이 답보하던 중 부장군 당주(幢主) 유신공은 부공(父公) 앞에 관(棺)하여 말하기를 “부모에게 효도가 보(報)이나 위국사명(爲國捨命)이 또한 신하지도(臣下之道)라”고 하면서 적진 진입을 간청하니 공은 감격하여 아들의 손을 잡고 “과연 화랑이로다”고 하시면서 이를 허하니 유신 장군은 “내 일찍이 떨치는 점령을 하고서 갑옷을 바르라고 들었도다”고 하면서 그물을 끌고 가서 평지에 쳐놓고, “내가 그물로써 점령하리라”고 하고는 곧 말을 달리면서 칼을 빼들고 적진의 바로 앞을 향하여 세 번 들어가고 세 번 물러나면서 매양 들어갈 때마다 혹은 적장을 베기도 하고 혹은 적의 영기(令旗)를 막기도 하여 모든 아군이 승승하니 북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적진을 공격하여 5,000여 명을 참살하니 그 성이 함락되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으니 진평왕 51년(629)이다.
낭비성(娘臂城)은 고구려 남진(南進)의 첨단성이며, 해국패망(該國敗亡)의 징조가 된 성이다. 또 양주 총관이 여러 차례 백제와의 전투에서 좌기예봉(挫其銳鋒)하고 사부득(事不得) 범경(犯境)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농상업(農桑業)에 종사하도록 하고 군신이 무주가지우(無冑迦之憂)하였으므로 신라 왕이 그 위업을 숭모하여 뇌양주 오봉산(五峰山)기슭에 안장하니 지금의 부부총(夫婦塚)이다.
부부총은 양산 북정리(北亭里)에 있으며, 무덤의 높이 9m, 폭 동서 50m의 큰 무덤이며 국가사적지 제93호이다. 그 남쪽 하부에 금조총(金鳥塚)이 있으나 공히 신라 가락계 고분임이 확인되고, 공의 시혜를 추앙하는 신기리민(新基里民)이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했으나 태풍에 유실되매 춘추원 백로산봉(白露山峰) 아래에 기적비를 세우고 도독공단(都督公壇)을 설하여 세세로 양산 유림이 향례(享禮)를 집전하고 승방손(承傍孫)이 배례하였다.
오호라. 양공은 신라에서 벼슬하여 재세사적(在世事績)이 동사(東史)에 재록(載錄)되어 후세에 전기(傳記)되나 첨소구궐(瞻掃久闕)하였으니 수위후손(殊爲後孫)이 무궁지한(無窮之恨)이던 바 지난 무신년(戊申年) 전 숭선전 참봉(前 崇善殿 參奉) 김종원(金鍾源) 족장 외 종원 다수가 논모공의하여 사우재실(祠宇齋室)의 건립에 합의하고 설계하여 부지 매입과 재실 건축에 착수했으나 막심한 난관으로 중단되었던 것을 1983년 계해 추향대제(秋享大祭)에 참여한 종원들이 재발의하여 1986년 병인에 군종 임원의 개선 후 즉시 착공하여 일차로 재실만의 완공으로 준공했다가 1992년 임신 군종친회 임원개선으로 정지와 원장(垣牆) 축조 및 사우 건립을 계획하고 이번에 완공하여 사호(祠號)를 취서사로 합정(合定)하고 양공을 합사(合祀)하여 향례봉심(享禮奉審)을 양산 유림이 집전하며, 승손(承孫)이 주관하게 되어 천추의 한을 씻어 오종(吾宗)의 소원이 성취되었도다. 사재(祠齋)는 취서산 기슭에 있으며 좌청룡 우백호가 흘립(屹立)한 명당이다.
송왈(頌曰) 영축의 범종소리에 양공의 관천위업(貫天偉業)이 벽공(碧空)에 휘휘(輝輝)하고, 삼한에 진동하던 진취(盡就)한 일통성업(一統聖業) 원천(遠天)도 알았으리.
취서사 재궁(齋宮)에는 천만잉손(千萬仍孫) 모여서 추원(追遠)을 감회(感懷)하니 일회지성(一會至誠)이 영구하리라.
엎드려 원하옵건대 사재가 존령의 무궁한 안식처로 되옵고 또한 군자강마지소(君子講磨之所)로 되게 하시와 거경석덕자(巨卿碩德者)를 변경에서 1,500년간 사장되게 했다가 지금 20세기 말엽에 여설산(如雪山) 출현케 하여 고대의 가락 문화를 재조명 고증함에 충분케 하옵소서.
각설(却說), 신라로 귀화한 세 왕자 중 세자 휘 무종공(武宗公, 奴宗)은 진지왕(眞智王) 2년 일선군(一善郡, 선산)의 백제 전에서 전사하여 태화성(太和城) 아래에 안장하여 비가 있었으나 없었진 것으로 전해진다. 휘 무력 각간공은 대백제전에서 승승(乘勝)한 신주군주(新州君主)로 도임(到任)하고, 어관산성(於管山城)[옥천]의 대전에서 백제 명구왕(明駒王)[성왕]과 그 재상 4인 급 사졸 수만 명을 난획(瀾獲)하니 삼한천지(三韓天地)가 경천동지하고 위세가 사해에 휘광(輝光)하였다.
또 진지왕 4년 백제가 신라 성인 마지현(麻知峴) 내리서성(內利西城) 등 여러 성의 길을 차단 공격할 때 공의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반공격파함으로써 수출성(輸出城)과 교산성(轎山城) 및 골포(骨浦)·칠포(漆浦)·감문(甘文)·초팔(草八)·사벌국(沙伐國) 등이 내항(來降)했으나, 공은 이 전투에서 전몰하였으니 이 전장이 얼마나 치열한 격전지였음을 감지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의 근기가 이 일전에서 조성되었고 백제는 망국지운(亡國之運)이 도래하였다.
신라 왕실과 국민은 공의 전몰에 비탄통분을 금치 못하다가 진평왕이 공의 공적을 숭모하여 사패장(賜牌葬)으로 정하면서 취서산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석물을 갖추어 취산(鷲山) 아래 계좌(癸坐)에 안장케 하고, 공훈을 선양하셨다.
화왕산(火旺山) 척경비(拓境碑)에도 공의 관산성(管山城) 대첩 등의 업적을 진흥왕은 높이 칭송하여 녹명(錄名)까지 하였으나, 분묘 조성 후 세류(歲流) 천여성상(千余星霜)하고, 역세역조(歷世易朝)의 누경변혁(累經變革)과 풍우상로(風雨霜露)로 봉분은 몰하(沒下)되고 석비는 망실되니 주인 없는 고분과 같음은 무한지한(無限之恨)이나 전 김 장군 묘라 하여 소망기원(所望祈願)하면 성취되는 시혜(施惠)가 있다고 향민(鄕民)에게 전해왔는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향화(香火)를 끊지 않고 벌초를 빼놓지 않아 묘역은 청결히 수호되었고, 조작(鳥雀)이 불유(不踰)할 뿐더러 등갈(藤葛)도 불범(不犯)하니 희유영지(稀有靈地)이며, 절세영걸(絶世英傑)의 영혼거백(英魂巨魄)이 인위차력(人爲借力)한 신통력이라 하겠다.
세사만물(世事萬物)의 현회성쇠(顯晦盛衰)가 천지순환(天地循環)의 순리라. 석(昔)에 독지종인(篤志宗人)이 전설을 근기 삼아 사서보첩(史書譜牒)을 심심숙독(深尋熟讀)하니 우리의 대선조(大先祖) 휘 무력 각간공 묘임이 확인되어 이를 내외 천명한 것이 숙종(肅宗) 때였으니 환희만끽(歡喜滿喫)이라. 후에 간결하나 승손이 전헌(奠獻)하니 제반사가 미진하여 매매(每每) 황송하던 바 이번에 사우와 재실이 완성되어 양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례(祭享禮)를 집전하게 되니 과거사에 감회가 교착되도다.
사우에 합사할 뇌양주도독 휘 서현공은 휘 무력 각간공의 아들로 진평왕 때의 명신이요, 흥무왕의 고(考)이시다. 사위만노군(仕爲萬弩郡, 진천) 태수이고,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청주] 등 10성을 공취 헌공했는데 낭비성은 고구려 군의 남진 요새이니 난공불락의 간성이었다. 우리들 후손은 국태민안과 승손흥성(承孫興盛)을 이룩하는 보시혜택(普施惠澤)을 소원하면서 마땅히 향화를 계속해서 빼놓지 않을 것이다.
사재 건립에 본군 김종원을 위시하여 부산·울산 종원들과 전국 종친 첨위(僉位)의 물심양면의 정성어린 출연으로 지금 준공을 맞게 되니 베푼 은혜가 한이 없으며, 양산향교 우동신(禹東臣) 전교, 동 김두성(金斗成) 향약장의 각별한 배려에 종친을 대표하여 심심한 사의를 드림과 아울러 본 사업을 추진하시다가 준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신 족장들의 명복을 기원하옵니다.
취산재장(鷲山齋長) 김인식(金麟植)
전 가락양산군종친회장 허남석(許南錫)
전 가락양산군종친회장 김우헌(金宇憲)"
[형태]
취서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콘크리트형 목조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