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10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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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山斥和碑 |
영어의미역 | Antiforeign Steles for Prince Regent |
이칭/별칭 | 척화비(斥和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667[소토로 3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태문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9년 5월 2일 - 양산 척화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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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양산 척화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성격 | 금석각류|척화비 |
건립시기/일시 | 1871년 |
관련인물 | 흥선대원군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36㎝ |
너비 | 51.5㎝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667[소토로 38] |
소유자 | 양산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건립경위]
조선 후기 고종 때 프랑스와 미국은 천주교 탄압과 통상 문제 등을 빌미로 강화도를 침범하여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일으킨다. 이들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이 제국주의의 통상 요구를 강하게 거부하고, 안으로는 천주교 탄압에 대한 의지를 굳히면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의 앞면에 작은 글씨로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우다(丙寅作辛未立)’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흥선대원군이 쓴 글씨를 신미양요가 끝났을 때에 비석에 새긴 것을 알 수 있다.
[위치]
상북면 소토리 소토초등학교 뒤편 광주안씨 문중 재실인 소계서원(蘇溪書院)의 정문인 ‘유도문(由道門)’ 오른쪽 담벼락 아래에 있다.
[형태]
비두 없이 비신과 비좌로 이루어진 통비로, 네모나게 깎은 돌의 상부 모서리가 접힌 규수(圭首) 모양을 하고 있다. 비석의 재질은 백색 화강암으로, 비신은 높이 136㎝, 너비 51.5㎝, 두께 19.3㎝이고, 비좌는 시멘트 바닥에 붙어 있어 측정하기가 쉽지 않다. 비문은 매우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
[금석문]
굵은 글씨로 비석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 새기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우리 만 년 뒤의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라고 적혀 있다.
[현황]
소계서원의 정문 오른쪽 담장 아래 가로 655㎝, 세로 155㎝, 높이 105㎝의 철제 보호 난간 안에 있다. 척화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재(私財)를 털어 군사 비용을 마련해 준 주사 여문조(呂文祚)를 기리는 ‘군인여문조무비창설불망비(郡人呂文祚武備刱設不忘碑)’와 군수 김익현(金益鉉)의 선정을 기리는 ‘행군수김후익현휼민선정비(行郡守金侯益鉉卹民善政碑)’가 있다. 오른쪽에는 척화비에 대한 설명을 적은 철제 안내판이 놓여 있다.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척화비는 1871년(고종 8) 전국 각지에 세워졌지만, 임오군란(1882)으로 흥선대원군이 청(淸)나라에 납치되고, 제국주의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는데, 양산의 척화비는 비교적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늘날 당시 외세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과 함께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능동적인 대처했어야 했다는 문제 의식을 제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