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1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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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外得 |
영어음역 | Gim Oedeu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석산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우정임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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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석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912년 10월 2일 |
몰년 | 1993년 9월 30일 |
대표경력 | 양산농민조합원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활동사항]
1912년 양산군 동면 석산리에서 태어난 김외득은 서울 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월 만세 시위 운동을 펼쳤다. 이 사건으로 구류 15일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귀향하여 1931년 4월에 조직된 양산농민조합에 가입, 소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첫째, 소작권 영구 확립, 둘째, 지세 공과금(地稅公課金)의 지주 부담, 셋째, 소작료 4할 납부 등을 결의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조합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김외득은 체포된 조합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애쓰다가 1932년 4월 2일 밤 물금역에서 열차를 타려다 검거되었다. 김외득은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김외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