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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232
한자 尹顯振
영어음역 Yun Hyeonjin
이칭/별칭 명구,우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성별
생년 1892년 9월 20일연표보기
몰년 1921년 9월 16일연표보기
본관 파평
대표경력 임시정부 재무위원장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윤현진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구(明九), 호는 우산(右山)이다. 7세 때 고향인 경상남도 양산 지역 만성재서숙(晩惺齋書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5세 때인 1907년에 숙부 윤상은(尹相殷)이 설립한 구포의 사립 구명학교(龜明學校)를 1회로 졸업하였다.

17세 되던 1909년에는 중국의 난징,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순회하면서 국제 정세를 익히고 돌아왔다. 191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 법률 공부를 계속하면서 신익희·김성수·장덕수·송진우 등과 함께 조선 유학생 학우회와 조국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하여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안희제의 백산상회에 입회하여 투자하고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는 한편, 양산 지역에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하여 후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일본 상인에 대항하기 위해 의춘상행(宜春商行)이란 소비조합을 설립·운영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소비조합운동이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고향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시영·이동녕·김구·노백린·여운형·신익희 등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미국 선교사를 통해 고향에 있던 사유재산 30만 원을 임시정부에 헌납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 재무위원장과 내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21년 9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 상하이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지금의 만국공묘]에 안장되었으나, 1995년 6월 23일 대전 국립묘지로 옮겨왔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5.16 오류 수정 [활동사항] 소표제 1914년 대학을 중퇴하고 -> 1914년 대학을 졸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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