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1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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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澄玉 |
영어음역 | Yi Jing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정수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양산(梁山). 아버지 이전생(李全生)은 인천군 이겸(李謙)의 후손이며, 고려 공민왕 때 이조판서 이만영(李萬英)의 아들이다. 이징옥의 선조 이겸은 원래 허씨인데 당(唐)나라 현종에게 헌공(獻功)하여 사성백(邪城伯, 현 인천광역시)의 사작(賜爵)을 받아 인천이씨가 되었다.
이전생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는 이징석이요, 차자는 이징옥이고, 삼자는 이징규이다. 이전생은 중추원영사(中樞院領事)로 퇴직하고 양산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나라에서는 이전생의 공적을 인정하여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으로 봉작하였다.
[활동사항]
이징옥은 어려서부터 무용이 뛰어나, 어머니를 위하여 멧돼지를 산 채로 끌고 오고, 호랑이를 호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갑사(甲士)로서 중앙에서 벼슬을 하다가 1416년(태종 16) 사직별시(司直別試)에 응하여 무과친시(武科親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복소윤(司僕少尹)으로 임명되었다.
1423년(세종 5) 황상(黃象)의 천거로 경원첨절제사로 발탁되어 아산(阿山)에 침입한 야인을 격퇴하고, 1425년(세종 7)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이때부터 1430년(세종 12)까지 여진이 침구(侵寇)할 때마다 변방의 방비에 큰 공을 세우자, 세종은 이징옥에게 9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를 만나볼 수 있도록 명하여 이징옥을 위로하였다. 얼마 동안 고향인 양산에서 한가로운 날을 보내다가 1432년(세종 14) 병조참판이 되었다.
1433년(세종 15)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를 거쳐, 1436년(세종 18) 회령절제사와 판경홍도호부사로 전직하였다. 그 후 함길도도절제사인 김종서(金宗瑞)와 같이 4진의 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2년 만에 그 방위와 경영의 포치(布置)를 완성하였다.
이징옥은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청렴결백하여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징옥은 동북변경의 개척 초창기에 제일선에 배치되어 야인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데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으나, 1435년(세종 17)을 고비로 4진의 안정을 얻게 되면서부터 대여진정책이 유화 내지 동화로 기울어졌는데, 마침 1438년(세종 20)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원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함경도를 떠났다. 그 뒤 100일 만에 다시 경상도·평안도도절제사 등을 맡았다.
1449년(세종 31) 20여 년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과 여진의 정복·회유·복속에 이바지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고, 1450년(문종 즉위년) 함길도도절제사로 부임, 10년 만에 다시 북방의 방위에 임하였다.
1453년(단종 1) 10월에 계유정란으로 김종서의 심복이라 하여 파직당하자, 후임자인 박호문(朴好問)을 죽인 뒤 병마를 이끌고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였으며,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의 후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 머물러 밤을 새울 때 종성판관 정종(鄭種)과 이행검(李行儉) 등의 습격을 받아 아들 3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징옥의 난은 조선 전기 1402년(태종 3) 11월의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큰 반란으로서, 후일 이시애(李施愛) 난의 선구가 되었다. 특히, 사대 사상에 젖었던 당시의 조선인으로서 황제를 칭한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상훈과 추모]
1698년(숙종 24) 『장릉지(莊陵誌)』에 신원상소(伸寃上疏)로 1791년(정조 15)에 모든 관직이 복권되었다. 충강공(忠剛公)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