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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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萬 |
영어음역 | Gwon Man |
이칭/별칭 | 일보,강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조선 후기 양산군수를 지낸 인물.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일보(一甫), 호는 강좌(江左). 권벌(權橃)의 6세손이다.
[활동사항]
권만은 일찍부터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여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1747년(영조 23)에 양산군수로 부임하였다. 당시 양산은 오봉산(五封山)[하북의 영축산, 상부의 천성산·석장산, 물금의 어곡산, 원동의 내포산] 설치로 여러 가지 폐단을 겪고 있어 고을을 떠나는 군민이 많았다. 역대 군수들은 자신의 지위 보장에만 급급하고 사경(死境)에 빠진 민심을 돌보지 않았다. 권만은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건의하여 오봉산 중 사봉산(四封山)을 즉시 해제하게 하고 내포산만 남게 하였다.
이후 수영수사의 모함으로 파면되었으며, 이에 권만은 상소하여 복직하고자 했다. 상소의 내용은 부패한 정치와 관원의 가렴주구(苛斂誅求), 군대징소집(軍隊徵召集)의 흑막 등 민생들의 고충과 관련된 양산의 실정이 담겨 있었다. 1749년(영조 25)에 참배하니 군민들이 어버이를 잃은 듯 슬퍼하였다. 또 권만은 양산에 오기 전에 앞서 정희량(鄭希亮)의 난에 의병을 일으키니 영남에서 따르는 군사가 수없이 많았다.
[저술 및 작품]
형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사 홍문관 제학이었던 정범조(丁範祖)가 1748년(영조 24)에 찬한 『강좌선생문집(江左先生文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788년(정조 12)에 이조참의로 증직되고 경상남도 양산 충렬사에 조영규(趙英圭)와 함께 배향되었다. 춘추원(春秋園)에 그의 사적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