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A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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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김기혁 |
과거 황산강(黃山江)으로 불렸던 낙동강 언저리인 용당은 가야와 신라의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경주의 신라와 김해의 가야가 서로 치고 받던 초기의 전쟁터로서 황산진의 입구와 황산하(黃山河)를 기록하고 있다.
황산진이란 물금나루나 용당나루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이후 532년에 신라가 김해의 가야를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김해 가락국(가야)의 수로왕이 신라왕의 초청을 받아 경주에 가기 위해 낙동강을 건넜던 곳도 이곳이었고, 수로왕이 노비를 시켜 당시 경주 세력을 구성하고 있던 한기부(漢祇部)의 대표를 죽이고 유유히 되돌아왔던 나루도 이곳이었다.
신라는 동북방의 실직곡국(삼척)과 음즙벌국(포항) 간의 국경 분쟁을 중재해 달라고 수로왕을 초청한 것이었으나, 수로왕은 사로6부 가운데 한기부만이 자신을 신분이 낮은 자로 초청한 것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표시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 권1, 탈해이사금 21년, 지마이사금 4년)
초기부터 신라와 가야가 이 지역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전투를 벌인 것은 낙동강을 건너기 위한 발판을 만들려는 지리적 요인도 있었다. 두 나라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황산진의 현재 위치는 지금의 양산시 동면 가산리 호포~부산시 금곡동 동원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교통로를 복원하여 생각해보면 신라가 가락국(가야)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경주에서 황산강(낙동강)을 거쳐 김해, 남해로 이를 수 있는 최단거리는 현재의 양산 주변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한편, 물금읍 증산리에서 황산강의 대안인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에는 삼국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각성산성(閣城山城)이 있다. 이 성은 신어산(神魚山)의 지맥인 각성산의 정상부 외곽을 따라 축조된 돌로 쌓은 산성인데 배치상으로 보아 맞은편인 물금들의 중간 정도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방어선을 강 건너의 양산 쪽으로 둔 듯하다. 따라서 황산진구의 유력한 후보지는 물금읍 물금리에서 부산시 금곡동 동원마을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지역에서 두 나라가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이유가 지리적인 이유 외에도 물금광산의 철을 둘러싼 쟁탈전도 중요한 배경의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에는 가야가, 후반에는 신라 우세로 바뀌게 되는 중요한 배경의 하나는 철을 생산하는 능력의 역전이었다.
신라는 4세기 들어 경주에서 울산으로 진출하여 달천광산을 확보하고, 5세기 중반에 동래로 진출하고 양산을 차지하여 물금광산마저 확보하게 되었다. 이제 가야는 더 이상 신라의 적수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가 가락국(가야)을 통합하면서 용당지역에는 드디어 치열했던 전투가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