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C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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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종봉 |
양산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통도사 쪽으로 가다가 어곡터널 쪽으로 좌회전해서 다리를 건너면 효충마을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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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충마을
이곳은 신라의 그 유명한 충신인 박제상이 태어난 곳으로, 효충사는 그를 모신 사당이다. 효충사를 찾기 위하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막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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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효충사는 1960년 소토리 율리마을의 안종석이 주도하여 설립하였고, 동년 11월 9일에 박제상과 그의 아들 박문량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1961년부터는 양산의 유림 효충계(孝忠稧)에서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을 기하여 향사하였다. 1967년 유림의 지원으로 묘정비(廟庭碑)를 건립하여 동년 4월 19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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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충사
그 후 1975년 효충마을 앞에 있었던 태창기업 사장 황태성 씨의 협조를 받아 현재의 담장 등 면모를 새롭게 갖추어 1988년 12월 23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안종석은 1845년 양산군수로 재임한 한긍인(韓兢人)이 건립한 박제상의 비문에 따라 효충곡이 박제상의 옛 주거지임을 확정하였고, 또한 부친 안병원을 통해 효충마을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 효, 열의 본산지인 이곳에 효충사를 건립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겨왔다. 이러한 뜻에 따라 결국 효충사를 건립하여 양산의 위상과 양산인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이 효충사에 모셔지고 있는 박제상[362~419]의 인물됨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는 신라시대 내물마립간과 눌지마립간 때에 살았던 인물로 자는 중운(仲雲), 호는 관설당(觀雪堂), 도원(桃園), 석당(石堂) 등이며 죽은 후 대아찬(大阿湌)에 추증되었다.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삽량주(歃良州) 수두(首頭)[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금교부인(金校婦人)이다. 395년(내물마립간 40)에는 고향인 삽량주 간(干)이 되어 고향으로 귀향했다. 401년 내물왕이 돌아가자 숙부 대서지(大西知)가 왕위를 찬탈하자, 선생은 관직에 물러나 고향에 징심헌(澄心軒)을 세우고, 우리나라 선도사를 정리하여 『징심록(澄心錄)』을 편찬하였다. 동지들과 협력하여 실성마립간을 물러나게 하고 눌지마립간을 옹립하였다.
417년(눌지마립간 원년)에 인질로 끌려간 국왕의 동생 복호(卜好)[고구려에 인질]와 미사흔(未斯欣)[왜국에 인질]을 구출해 올 사람을 구하자, 박제상이 자원하였다. 박제상은 눌지마립간의 두 동생을 구출한 후 왜국 하카다[博多] 기시마[木島]에서 충절을 지키다 희생당했다.
박제상은 1남3녀를 두었는데, 부인과 장녀 아기, 그리고 셋째 아경은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박제상의 귀국을 기다리다가 자진하니 몸은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곳에 은을암을 세워 삼모녀를 모시니, 국가에서는 치술령 아래 신모사(神母祠)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박제상의 둘째 딸인 아영(阿榮)은 당시 5세 된 박문량(朴文良)을 키웠으며 나중에 장성하여 눌지마립간의 아우 미사흔의 부인이 되었다.
박문량은 커서 각간(角干) 이수현의 딸과 결혼하여 관직에 있다가 향리로 돌아와 거문고와 일생을 같이 하였다. 이분이 바로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 선생이다.
관설당 박제상의 추모사업은 고려 태조 때에 동계사(東鷄祠)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조선 세종과 숙종, 그리고 정조는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고 선생과 부인의 영정을 회상(繪像)하여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을 간행하였고, 유생들은 영해 운계서원, 울주 치산서원과 양산의 춘추원 삼조의열단 등에서 매년 양력 4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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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의 비
현재 양산시에서는 효충사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사에 있어 박제상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 학문적 업적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를 통하여 그 연구 성과를 복원사업에 반영, 박제상의 인품을 정확하게 알리고 기리는 명실상부한 기념사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