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C04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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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종락 |
박제상의 생가터로 알려진 효충사는 마을 주민 정세영(77세)이 전담하여 관리하고 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정세영 씨는 ‘관리인’이라는 말에 손사래를 치면서 펄쩍 뛰다시피 부정한다. 열쇠만 가지고 있을 뿐 결코 관리인이 아니란다. 그러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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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인
향토사학자인 고 안종석 씨에 의해 1960년 효충사가 창건된 이래 1971년에 대지 확장 시 몇 개의 축대석이 발견되었고, 1977년에 정영호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단국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박제상의 생가터임을 확증 받았다.
그 뒤 1978년에 박제상을 시조로 하는 영해박씨 종친회에서 향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에 관설당 박제상과 그의 아들 백결 박문량(朴文良) 선생의 두 위패를 봉안해 오던 이곳에 양산 지역 유림에서 김서현(김유신의 아버지)등 두 사람의 위패를 더 봉안하게 되면서 갈등이 생겼다.
영해박씨 측에서는 ‘왜 우리 조상 사당에 다른 조상을 모시느냐’는 것이었고, 양산 유림에서는 효충사의 창건·증축에 영해박씨 문중에서 경비도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창건 배경 자체가 충효에서 귀감이 될 사람들을 기리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위패도 얼마든지 봉안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지금은 영해박씨 문중에서 춘추로 향사만 치르고 있다. 이 와중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기 싫은 정씨로서는 관리인의 자리를 한사코 고사했으나 마땅히 맡을 사람도 없는 상태고 해서 정씨의 말 그대로 지금은 열쇠만 보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는 사이 효충사는 을씨년스럽게 피폐해져가고 있다.
그렇다고 정씨의 효충사에 대한 애정 자체가 식은 것은 아니다. 양산시에서 효충사 성역화 사업의 확장 일환으로 주변 땅을 2만㎡ 매입하기로 했다가 예산부족을 이유로 1만㎡로 줄였다고 하는데 대해 불만이 많음에서 그 일면을 볼 있겠다.
“2만㎡도 좁은데 1만㎡에다 어떻게 성역화 사업을 펼 수 있겠느냐. 애초에 시에서는 승용차 100대, 버스 세 대 정도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시설까지 마련된 넓은 효충사를 재건하려고 했는데, 이럴 경우 수십만㎡의 땅이 필요할 것이다. 설령 그만한 땅을 확보한다 해도, 현재 마을 진입로에서 효충사까지 승용차로도 접근이 쉽지 않는 노폭인데 버스가 어떻게 접근을 하겠느냐? 이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하고 걱정한다.
그러면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공단 속 논 가운데에 있는 현재의 위치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조금만 위쪽으로 올라가서 산자락에 옮겨서 재건함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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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충사 뒤 산자락
정씨가 이건하기를 주장하는 장소는 임야이기에 적은 돈으로도 넉넉한 땅을 확보할 수 있어 부족한 예산 문제가 해결되는데다 성역으로서의 위치로도 훨씬 좋은 곳이기 때문에 일석삼조라는 것이다. 현재의 위치에는 탄생지 표지석만 세워두면 될 것이라고 했다.
헤어질 때, “어찌되었든 재건할 효충사는 규모면에서 박제상 부인을 기리는 치산서원(鵄山書院)[울주 두동면 만화리의 치술령 자락, 은을암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박제상 보다 박제상의 부인을 기리기 위한 서원의 성격이 더 짙다.] 보다는 훨씬 더 큰 규모로 하루 빨리 세워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것이 거개의 양산시민들과 같은 생각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