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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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전라남도 영암군의 역사.
[개설]
영암군은 영산강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과 바다를 경계로 목포와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원년) 목포가 개항된 이후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육상 교통로의 경우 강진군 관내 병영을 경유하여 장흥에 이르는 도로가 개설되어 화물과 사람의 왕래가 편리해졌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11개면으로 편제되었으며, 1921년 금정·군서·신북·도포·학산·삼호·시종 각 면에 주재소가 설치되었다. 1919년 4월 10일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함께 영암 지역에서도 다양한 청년 단체와 노동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경제]
식민지 통치 시대에는 일본 이주민과 토착 지주에 의한 대규모 농장 경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1930년대 이후 미암면과 군서면, 서호면 등지에서 대규모 간척 사업이 이루어졌다. 대규모 농장들이 발전한 것에 반해 상대적으로 대다수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 체제는 영암 지역의 전통적인 농업 문화를 와해시켰고, 이로 인해 소작농의 증가와 농업을 포기하고 영암을 떠나는 사람들도 증가하게 되었다. 1934년 농촌을 떠나는 농민이 영암 지역에서만 200여 호에 달할 정도로 농촌 경제가 급속히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목포·무안·함평·담양·나주 등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1936년 무렵에는 한반도 북쪽 지역으로 살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양상이었다. 쌀농사 외에 일제 강점기 이 지역의 대표적인 특산품이 된 육지면 재배가 왕성하였으며, 1929년에 관연 판매(官煙販賣) 주식회사 영암 영업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사회]
1919년 4월 10일에는 최한오, 조극환, 김민규, 김영언, 박규상, 정학순 등이 중심이 되어 4월 10일 영암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7월 21일 영암 열무정에서는 영암 청년회가 창립되어, 애국 계몽 활동과 야학, 소년단 지원, 체육 활동 등 다양한 사회 참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도 영암 기독교 청년회 등 여러 사회 참여 단체들이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영암 출신의 여러 인사들도 참여하였고, 이 때 최규창, 최상호, 김필재, 문학연, 유상걸 등이 투옥되었다.
1927년에 신간회 영암 지회가 조직되어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0년대 들어서는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이 고양되었다. 이는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과 관련하여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1931년에 소작민들이 농장주들의 횡포에 맞서 쟁의를 벌인 영보 형제봉 사건이 발생하여 130명의 농민들이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4년에 발생한 항일 농민 운동인 전남 운동 협의회 사건에도 영암 지역 농민 운동 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 이와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공판을 받기도 하였고, 1932년에는 장암리 데모 사건이 발생하여 경찰이 백룡산을 포위하여 수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영암 지역에도 건국 준비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사회 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조극환이 맡았다.
[교육]
1908년 영암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된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에 영암 지역의 각 면에서 학교가 설립되어 갔다. 1917년 구림, 1921년 서창, 1922년 신북, 1924년 금정, 장천, 1925년 도포, 1926년 학산, 1936년 미암, 1937년 군서북, 1938년 신북남, 덕진, 1943년 영암동, 1944년 삼호·영보·서호북 지역에 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 시설들이 생겼다. 1920년대에는 취학을 희망하는 아동에 비해 학교 시설이 크게 부족하여 영암 지역의 유지들과 청년들이 후원하는 영암 강습회와 야학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3년에는 덕진 운수 조합이 설립되어 그 수익금으로 강습회를 운영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는 등 교육 사업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심과 지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