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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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玩龜亭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서당길 25-34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태훈 |
건립 시기/일시 | 1546년 - 완귀정 안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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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695년 - 완귀정 사랑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0년 6월 17일 - 완귀정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0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완귀정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완귀정 - 경상북도 영천시 서당길 25-34[도남동 595] |
성격 | 누정 |
양식 | 이익공|겹처마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3칸 |
소유자 | 광주 안씨 문중 |
관리자 | 광주 안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
문물|보호단위 등급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
[정의]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광주 안씨(廣州安氏) 영천 입향조인 안증(安嶒)을 위해 건립한 정자.
[개설]
안증[1494~1553]의 자는 사겸(士謙), 호는 완귀(玩龜)이다. 안증은 조선 전기 중종 때 학자로 벼슬에는 뜻이 없고 학문[성리학]에만 전념했다. 후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가 되어 후에 인종에게 민본사상을 주창했지만 실패했다. 또 을사사화로 인해 벼슬에 염증을 느끼고 영천으로 내려와 후학에 힘썼다. 완귀정은 안증의 사랑채로 그의 호를 따 후손들이 건립한 건물이다. 저서로는 『완귀실기(玩龜實記)』가 전하며, 금호읍 구암리에 묘소와 도동의 호연사유허비가 남아있다.
[위치]
완귀정(玩龜亭)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서당길 25-34[도남동 595]에 있다. 영천시내에서 경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국도 4호선을 따라 영천인터체인지 방면으로 가다보면 우측으로 도남동으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북안천에 놓인 도남교를 지나자마자 우측에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그 끝 북안천변에 완귀정이 있다.
[변천]
완귀정[안채 및 사랑채]은 조선 전기 학자 안증이 영천으로 이거한 후 1546년에 건립한 살림집인데, 1695년 후손 성재(省齋) 안후정(安后靜)[1659~1702, 자 군경(君敬)]이 사랑채를 지으면서 안증의 호를 따 완귀정이라 했다. 1980년 6월 17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완귀정은 안증의 살림집 사랑채로 북안천변 언덕에 ‘一‘자형의 북동향한 완귀정과 남동향한 식호와(式好窩)가 별채로 분리되어 ’ㄱ’자형을 취하고 있다. 완귀정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건물 뒷열 측면에 1.5칸의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두었다. 진입은 건물 배면의 사분합들문을 통해 대청으로 오르는 배면진입이다. 전면의 퇴칸 가장자리에는 계자각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어 중층의 누각형식을 따랐다.
창호는 건물 전면과 대청 배면에 사분합들문을 두어 유사시 공간확장을 꾀했고, 퇴칸 측면에는 쌍여닫이 판창을 두었다. 방의 배면에는 머름 위에 쌍여닫이 세살창을 두었고 측면에도 머름 위에 외여닫이세살창을 두었다. 특히 측면칸의 가운데 칸은 반으로 나누어 방과 마루로 꾸몄는데 일반적으로 그 경계부는 기둥이 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완귀정은 기둥 없이 벽선으로 처리했다.
구조는 중층의 누각형식으로 전체에 자연석주춧돌 위에 원주를 세워 화려한 이익공양식을 따른 오량가 구조이다. 특히 건물의 모서리에는 활주를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로 매우 격식있게 했으며, 암막새와 수막새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편 완귀정 남쪽에는 별도의 일곽을 이루는 안채영역이 있다.
[현황]
완귀정과 직교해 정면 5칸, 측면 1.5칸의 식호와라는 건물이 있다. 완귀정 배면 어칸 상부에 ‘완귀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남쪽에는 안증의 살림집이 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정자는 잘 정돈되어 있고 관리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완귀정은 겹처마·활주·이익공 등의 정자건물로는 매우 격식있는 수법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대청배면의 사분합 들문을 한 예는 극히 드문 것으로 매우 귀중한 건축적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