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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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忠孝齋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별빛로 1538-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우경원 |
건립 시기/일시 | 1923년 - 충효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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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7년 - 충효재 보수 정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9년 5월 29일 - 영천충효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81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영천충효재 경상북도 기념물 재지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12년 현재 - 충효재 건물 보수 |
현 소재지 | 충효재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별빛로 1538-5[충효리 626] 외2필 |
성격 | 재사 |
양식 | 물익공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5칸 |
관리자 | 정호용 외 2인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기념물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 정환직(鄭煥直)과 정용기(鄭鏞基) 부자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한 재사(齋舍).
[개설]
충효재는 1905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아 영천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의 충효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동네 이름을 검단동에서 충효동으로 고쳐 1923년에 건립하였다.
정환직[1843~1907]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정치우(鄭致右),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암(東巖)으로 경상북도 영천 출신이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를 보내며 구국거의(救國擧義)의 뜻을 전하였다.
1907년 10월 7일 아들이 입암에서 영천 수비대소속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적군의 총탄에 의하여 순절하자, 의병장에 올라 국민들의 반일 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다 결국 잡혀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정용기[1862~1907]는 한말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관여(寬汝), 호는 단오(丹吾)이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으로 의병장 정환직(鄭煥直)의 아들이다. 1906년 아버지가 고종으로부터 항일 거병의 뜻이 담긴 밀지를 받자 아버지에게 거병을 간청하였다. 1907년 10월 입암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변천]
충효재는 동네 이름을 검단리에서 충효리로 개명하고 1923년에 건립하였다. 이후 1987년 보수 정비하였으며, 2012년 현재 충효재 건물 좌측 전면에 있는 추녀 및 연목이 훼손되어 보수 중에 있다.
부자(父子)의 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충효재와 유허비가 세워졌고, 1963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으며 조양각(朝陽閣) 앞에는 산남의진 기념사업회에서 산남의진비를 세웠다.
[형태]
충효재는 세로로 긴 직사각형에 가까운 대지에 재사와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고 주변은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치 형식은 재사 전면에 사주문을 세워 출입케 했는데 ‘호국문(護國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호국문 좌측 담장 밖에 ‘소헌정공학덕추모비(笑軒鄭公學德追慕碑)’가 세워져 있다.
담장 안에는 사주문과 재사 사이 좌측 편에 유허비와 화천지수(華川之水)비가 세워져 있다. 재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며, 실의 배열은 가운데 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각 1칸씩의 방을 드린 중당협실형이다. 재사 전·후면에는 마루를 설치하여 공간을 확장하였는데 전면에는 툇마루를 짜고 계자 난간을 두른 헌함을 설치했고, 배면에는 쪽마루를 들였다.
정지한 대지에 자연석 3~4단 높이로 기단을 축조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전면 툇마루 앞에만 원주를 세우고 나머지는 각주를 세웠다. 창호는 방의 경우 정면 쪽은 하인방 위에 머름을 설치하고 쌍여닫이세살창을 달았고 청방간에는 사분합불발기문을 설치하였다.
대청은 전면에 아래 굽널을 끼운 쌍여닫이굽널세살문을 달아 마루방을 이루게 했고, 뒷벽은 판벽으로 구성하고 쌍여닫이판문을 달았다. 전면 기둥 상부에는 익공의 끝 모양을 둥글게 만든 물익공을 끼우고 장혀와 창방사이에는 소로를 수장하였다. 도리는 방형의 납도리를 사용하였다. 가구는 3량 구조로 대들보 위에 원형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온돌방을 드린 보 아랫부분은 구조적 보강을 위하여 창방 형식의 가로부재를 결구하였다. 지붕는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이다.
[현황]
충효재 주변은 비교적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재사 건물의 경우 좌측 전면 추녀가 부러지고 연목이 손상되어 적심이 노출되어 있다. 조사 당시 보수를 위한 가설덧집이 설치되어 있었다.
[의의와 평가]
충효재는 정환직·정용기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9년 5월 2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된 건물이다. 근대에 건립되었지만 조선 시대 건축 기법과 영천 지역의 누정 건축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보존·관리를 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