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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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苓田齋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 운주산길 59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우경원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에 있는 이전인(李全仁)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사.
[개설]
이전인[1516~1568]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부(敬夫), 호는 잠계(潛溪)이다. 부친은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이다. 천성이 온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몸가짐은 경근(敬謹)하게 하였고, 학문 또한 깊었다.
1547년에 부친 이언적이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으로 강계로 유배되자, 이전인 또한 직접 유배지로 내려가 정성을 다하여 부친을 봉양하였다. 부친이 폄적(貶謫) 당한 지 7년 만에 죽자, 예를 다하여 거상(居喪)을 하였다. 1566년에 부친이 생전에 써놓은 「진수팔조(進修八條)」[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여덟 가지 조목]의 상소를 올렸다.
[위치]
영전재(苓田齋)는 임고면 수성2리 영전마을에서 운주산길로 500m 이동한 후 좌회전하면 개울 건너편에 있다.
[변천]
영전재 대청상부 종도리 장혀 하부에 ‘상지사십삼년병오삼월...(上之四十三年丙午三月...)’ 묵서가 기록되어 있다. ‘상지사십삼년병오...’란 기록으로 남긴 비문, 기문 등의 작성자가 당시 ‘왕이 등극한 지 43년 병오년’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조선 시대 왕조 중 상지 43년까지 이어진 왕대는 숙종[46년]과 영조[52년] 밖에 없는데 둘 다 병오년 간지와 맞지 않는다.
실제 왕위가 32년 동안 이어졌던 고종은 양위를 한 다음에도 민간에서는 여전히 고종년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상지’를 고종으로 보고 43년에 해당하는 간지를 보니 병오년과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영전재의 건립 연대는 1906년(광무 10, 고종 43) 이다.
[형태]
영전재는 뒤로는 산을 등지고 3면은 개방되어 있는 곳에 재사 및 관리사가 담장 없이 세워져 있다. 출입하는 문은 두지 않았고 재사 좌측 편에는 관리사가 있다. 재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가운데 둔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방 2칸, 우측에 1칸의 방을 드린 형식이다. 벽장 등의 평면적인 확장은 없고 전면에 쪽마루가 최근에 설치되어 있다. 경사지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이중으로 기단을 조성하였다. 정면 기단은 자연석을 3단으로 쌓고 상면은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였다.
초석은 넓적한 자연석을 놓았고 기둥은 모두 각주를 세웠는데 단면 크기가 200×200㎜로 규모에 맞는 적절한 것을 사용하였다. 기둥상부는 납도리와 장혀, 보아지, 대들보를 결구한 간략한 구조이다. 가구는 3량 구조로 대들보 위에 동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게 했다. 종도리 장혀 하부에는 상량 묵서가 기록되어 있다. 창호는 방의 경우 전면에는 하부에 통머름을 놓고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측면에는 창호를 설치하지 않고 좌 측방 배면에만 외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청방간에는 아래 굽널을 끼운 외여닫이 굽널세살문을 달았다. 대청 전면에는 판벽 사이 아래 굽널을 끼운 쌍여닫이 굽널세살문을 달아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대청 뒷벽은 판벽을 설치하고 쌍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처마는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이다.
[현황]
영전재는 최근에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재사 앞마당은 전체 쇄석을 깔아 정비하였다. 목부재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쪽마루는 전체가 신재로 교체되고 연목도 다수 교체된 흔적이 보인다. 기와도 새롭게 번와되었고 정면에만 처마 끝에 함석판을 덧대어 처마를 연장하고 끝에는 물받침을 설치하였다. 벽체의 경우 정면 하방 아래쪽은 벽돌로 고막이벽을 설치하였고 그 외는 회 미장으로 마감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영전재는 영천 지역의 일반적인 재실의 평면을 따르고 있는 ‘一’자형이지만 지붕형식이 다르다. 이는 당초 팔작지붕인지 지붕 개량으로 인해 맞배에서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최근 보수와 정비가 이루어져 타 재실보다는 관리가 양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