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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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時代 |
영어공식명칭 | Joseon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방기철 |
[정의]
1392년 조선의 건국부터 1863년까지 강원도 영월 지역의 역사.
[개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영월의 행정구역은 고려 시대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1399년(정종 원년) 영월은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고, 원주진(原州鎭)에 소속되었다. 1466년(세조 12) 관제 개편 때 지군사(知郡事)가 군수(郡守)로 바뀌었다. 1698년(숙종 24) 노산군(魯山君)을 단종(端宗)으로, 노산군의 묘를 장릉(莊陵)으로 추봉하면서 부(府)로 승격되어 지방관도 종3품의 부사(府使)로 바뀌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영월은 324호였다. 그런데 1760년(영조 36) 2,340호, 1789년(정조 13) 2,630호, 1829~1831년(순조 29~31) 2,772호, 1871년(고종 8) 27,82호가 되어, 영월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행정구역]
조선 시대 영월군은 영흥리(永興里)·방절리(芳節里)·상덕리(尙德里)·상덕하리(尙德下里)·진동리(津洞里)·상하송리(上下松里)·덕산동(德山洞)의 부내면(府內面), 정양리(正陽里)·별이동(別梨洞)·진구리(津邱里)·각동리(角洞里)·대야리(大野里)·옥동리(玉洞里)·밀동리(密洞里)·예미촌(禮美村)·와인리(臥仁里)·거석리(擧石里)·주문리(注文里)·외직리(外直里)·용연리(龍淵里)·내리(內里)의 하동면(下東面), 연지동(蓮池洞)·화라리(禾羅里)·이목리(梨木里)·녹반리(碌磻里)·유전리(柳田里)·직동리(稷洞里)·내덕리(內德里)·구래리(九來里)·소미론(小味論)의 상동면(上東面), 삼옥리·묵동리·거운리·문천리·거산리의 천상면(川上面), 양연리(楊淵里)·창동리(倉洞里)·원동리(院洞里)·승당리(升堂里)·팔계리(八溪里)·월궁리(月弓里)·흥교리(興敎里)·조전리(助田里)·괴안리(槐安里)의 남면(南面), 북포리(北浦里)·평동리(坪洞里)·사정리(射亭里)·후평리(後坪里)·옹산리(甕山里)·전동리(錢洞里)·신천리(新川里)·용정상리(龍井上里)·용정하리(龍井下里)·토교리(土橋里)의 서면(西面), 마차리(磨差里)·모전리(茅田里)·세곡리(細谷里)·덕전리(德全里)·연평리(延平里)·공기리(恭基里)·덕전상리(德全上里)·문포리(文浦里)의 북면(北面) 등 7개 면 62개의 리로 구성되었다. 동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90리[35.35㎞], 남쪽으로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35리[13.74㎞], 서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45리[17.67㎞], 북쪽으로 평창군(平昌郡) 경계까지 45리였다. 영월에서 한성(漢城)까지의 거리는 400리[157.09㎞]였다.
[교육]
조선 시대에는 1읍 1향교(鄕校)의 원칙에 따라 각 읍마다 향교를 두었다. 영월의 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설치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건립 연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1473년(성종 4) 향교의 기와를 교체하였고, 1574년(선조 7)과 1604년, 1634년(인조 12), 1677년(숙종 3), 1795년(정조 19) 등 지속적으로 수리가 이루어졌다. 1825년(순조 25)에는 부사 이기재(李基栽)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서원(書院)은 명현(名賢)을 기리고 후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기관이다. 1685년(숙종 11) 감사 홍만종(洪萬鍾)과 군수 조이한(趙爾翰)에 의하여 영월에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우(祠宇)가 건립되었다. 1699년 ‘창절(彰節)’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어, 창절서원은 영월 지역의 선현 배향과 교육을 담당하였다. 1791년 엄흥도(嚴興道)와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추가 배향하였고, 그 뒤 다시 화의군(和義君)을 배향하였다. 창절서원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교통]
조선 시대 교통은 역(驛)과 원(院)이 중심이다. 영월에는 보안찰방(保安察訪) 소속하에 양연역(楊淵驛)과 연평역(延平驛), 제덕원(濟德院)과 용정원(龍井院)이 있었다. 한편 영월의 세곡은 주로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영월에는 읍창(邑倉). 동창(東倉), 사창(杜倉), 서창(西倉) 등이 있었는데, 읍창과 동창, 사창, 서창에 보관한 곡물은 배로 남한강을 따라 원주의 흥원창(興元倉)으로 옮겨졌다. 그 외 영월에는 후진(後津)과 밀적포(密積浦)의 진과 포가 있었다.
[단종과 영월]
단종은 1441년(세종 23) 7월 23일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 사이에서 태어났다. 1448년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52년 왕위에 올랐지만,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계유정난(癸酉靖難)]. 1455년 윤6월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세조 2) 6월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을 중심으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淸泠浦)로 유배되었다. 청령포에서 유배생활 중 홍수로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자, 1457년 세조는 단종의 사사(賜死)를 명하였고, 단종은 17세의 나이에 죽임을 당하였다.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정사종(丁嗣宗)은 엄흥도와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후 청령포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단종을 보필하던 추익한(秋益漢)은 단종이 죽은 후 목숨을 끓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시대 영월은 충의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1681년 숙종은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추봉하였다. 1698년 시호(諡號)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묘호(墓號)를 단종(端宗)으로 추증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1704년에는 『노산군일기』를 『단종실록』으로 이름을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