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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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夢周先生墓 |
영어음역 | Jeong Mongju Seonsaeng Myo |
영어의미역 | Tomb of Master Jeong Mong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3[능곡로 45]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주홍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2년 5월 4일 - 정몽주선생묘 경기도 기념물 제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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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정몽주선생묘 경기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묘 |
양식 | 원형합장분 |
건립시기/일시 | 조선 전기 |
관련인물 | 정몽주 |
높이 | 220㎝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3[능곡로 45]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기도 기념물 |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정몽주의 묘.
[개설]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고려 후기에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우고 개혁을 주도하였다.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자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이 정몽주를 살해하였다. 성리학에 매우 밝았던 정몽주는 오부학당, 향교를 설치하여 유학을 진흥시켰다. 정몽주는 1517년(중종 12)에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변천]
정몽주의 묘는 본래 원형봉토분으로 곡담이 있었고, 석물은 계체석과 상석 2기, 묘표 1기, 문인석 2기만 있었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면서 동년 12월에 상석을 교체하였고, 1974년에는 곡담 35m를 보수한 것을 비롯하여 봉분에 호석과 난간석을 돌렸으며 문인석·양석·장명등을 새로 조성하였다.
또한 1980년대에는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묘를 수축하고 재실 경역에 있는 민가 3채를 이전하였고, 마을 입구에 있는 신도비에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이후 2003년에는 전사청인 모현당(慕賢堂)을 신축하고 2005년에는 관리사인 경모사(敬慕舍)를 신축하였다. 이후 잔디광장을 신설하였고 묘역 입구를 새로이 단장하였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기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봉분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고 우측에는 묘표가 1기 세워져 있다. 상석 좌우로는 망주석 1쌍, 상석 1쌍, 문인석 2쌍, 석양 2쌍이 배치되어 있고, 봉분 주위에는 곡담이 둘러처져 있다.
묘표는 방부운수(方趺雲首) 양식이며, 비신의 윗면은 ‘凸’ 모양으로 다듬어 운수를 그 위에 얹어 놓았다. 운수의 앞뒤에는 구름무늬를 가득 장식하였다. 건립 연대는 1517년(중종 12)으로 추정된다. 총 높이는 약 220㎝로, 비신높이는 151㎝, 너비는 62㎝, 두께는 15㎝이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있는 사모지붕 비각 내에 서향(西向)으로 안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으로 1696년에 세웠고, 1699년에 기록을 하였다. 방부의 비신 세우는 곳에 3단으로 층계를 마련하여 입체감을 살리고, 개석의 처마곡선 양끝을 경사지게 올린 것이 특징이다. 총높이는 약 388㎝로 비신 높이는 238㎝, 너비는 89㎝, 두께는 39.5㎝이다.
[금석문]
묘표의 비신 앞면 중앙에는 한 줄로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음기를 각자하였다.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미상이다.
신도비에는 “황명고려수문하시중익양군충의백포은정선생신도비명병서(皇明高麗守門下侍中益陽郡忠義伯圃隱鄭先生神道碑銘幷序)”라고 쓰여 있다. 비문은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김수증(金壽增)이 서(書)하였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篆)을 올렸다.
[현황]
정몽주 선생의 묘는 경기도기념물 제1호답게 잘 정화되어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일대에는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일가의 묘역이 분포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정몽주 선생 묘역은 1970년대에 대대적인 정비작업으로 원형이 바뀌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몽주 선생의 신도비는 당대 최고의 명사들이 제작에 참여하여 금석학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