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637
한자 扶餘 陵山里 寺址
영어공식명칭 Temple Site in Neungsan-ri, Buye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홍보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2년~2022년 - 부여 능산리 사지 총 11차례 조사 실시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9월 29일연표보기 - 부여 능산리 사지 사적 제434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여 능산리 사지 사적으로 변경 지정
소재지 부여 능산리 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 지도보기
성격 절터
지정 면적 29,990㎡
관리자 부여군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백제 시대의 절터.

[개설]

부여 능산리 사지(扶餘 陵山里 寺址)는 1992년 1차 조사를 시작으로 2023년까지 모두 11차례 조사가 되어 중문지, 목탑지, 금당지, 강당지, 공방지, 회랑 등 사역 중심지와 배수로, 목교지와 석교지, 기와 가마 터 등의 부속 시설들이 확인되었다. 탑지 심초부에서 출토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의 명문에 의하여 능산리사가 567년(위덕왕 13)에 창건된 성왕의 기원 사찰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부여 능산리 사지는 2001년 9월 29일 사적 제43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2023년 현재까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상당히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1992년도의 공방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중앙칸의 목곽 수조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백제 금공예술을 대표하는 유물로서 평가되어 1996년 5월 30일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과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다.

[위치]

부여 능산리 사지부여 왕릉원부여 나성 사이에 있다.

[형태]

부여 능산리 사지부여 나성부여 왕릉원 사이의 곡간부를 메워 평탄 대지를 조성하고, 가람을 배치하였다. 가람은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된 1탑 1금당식이다.

중문지는 목탑지 남쪽으로 18.6m의 거리에 있으며, 정면 3칸·측면 1칸의 구조이다. 금당지 남쪽으로 21.1m 떨어진 곳에 있는 목탑지는 판축 공법으로 기단토를 조성하였고 상하의 이중 기단이다. 하층 기단은 동서 11.73m·남북 11.79m이며, 상층 기단은 동서 10.4m·남북 10.3m이며, 화강암을 정교하게 가공하여 만든 가구식 형태이다. 목탑지의 초층 주칸은 3칸이며, 층수는 5층으로 추정된다. 목탑지 중앙부에서 찰주와 심초석이 확인되었다. 심초석은 목탑지의 바닥면으로부터 114㎝ 아래에 있고, 동서 106㎝·남북 130.5㎝·두께 50㎝ 크기의 장방형이다. 심초석 위에 위치한 찰주는 지름 40~50㎝ 크기의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찰주 옆에서 발견된 사리감은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고, 뚜껑은 확인되지 않았다. 심초부에서는 금실, 금동판, 은제 과대 장식[교구, 꾸미개], 유리옥, 소조불 등이 출토되었다.

금당지의 기단은 이중으로 조성되었다. 하층 기단은 동서 21.62m, 남북 16.16m로서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상층 기단은 동쪽과 남쪽의 기단석만 남아 있는데, 규모는 동서 19.94m·남북 14.48m로 추정되었다. 지대석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앞면을 정교하게 치석하였다. 치석된 지대석 윗면의 안쪽으로 약 11㎝ 들어간 부위에 별도의 면석을 올리기 위한 ‘󰠤’ 모양의 단이 만들어져 있어 면석이나 갑석을 올린 가구 기단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금당의 구조는 정면 5칸·측면 3칸인데, 중앙칸이 넓고 측칸이 좁다. 남북 양쪽의 하층 기단에는 금당지 출입을 위한 계단 시설이 설치되었다.

강당지는 금당지로부터 북쪽으로 16.26m 거리에 있으며, 동실과 서실로 구분된다. 기단 규모는 동서 37.40m, 남북 18m이다. 기단은 잡석과 와적으로 이루어졌다. 남쪽 기단은 높이 50~60㎝로 8~10단을 쌓았고, 북쪽 기단의 높이는 15~20㎝이다. 서쪽 기단도 잡석을 쌓았고, 동쪽은 와적 기단이다. 강당지는 구조가 다른 2개의 방이 있고, 2개의 방 사이에는 좁은 통로가 있다. 서실은 퇴칸이 있고, 퇴칸 앞쪽이 통로로 공방지 Ⅱ로 연결되었다. 동실에는 퇴칸이 없고, 동쪽 벽 중앙에 성격을 알 수 없는 건물지 Ⅰ로 연결되는 통로가 되는 건물이다.

건물군을 둘러싸고 동쪽, 서쪽, 남쪽에는 회랑이 돌려져 있다. 동·서 회랑의 기단은 길이 12~35㎝의 잡석을 이용하여 2~3단으로 쌓았고, 모두 11칸이다. 동쪽 회랑의 기단 길이는 42.94m로 서쪽 회랑의 기단 길이와 같아 11칸으로 추정된다. 남쪽 회랑지는 파괴가 심하나 기단 너비는 동·서 회랑의 너비와 같고, 중문지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각각에 9칸의 주칸이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서 회랑지 밖의 소형 건물지, 서쪽 회랑지 북쪽 끝에 연결된 공방지Ⅰ, 공방지 Ⅰ의 북쪽에 있는 공방지 Ⅱ, 강당지 동쪽의 불명 건물지Ⅰ, 동쪽 회랑지 북쪽 끝에 연결된 불명 건물지 Ⅱ, 중심 사역 외곽에 설치된 석축 배수로, 북측 석축 배수로 북쪽의 건물지, 서쪽 배수로에 설치된 석교지와 목교지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공방지Ⅰ 중앙칸의 목곽 수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여 능산리 사지는 백제 사비 시기의 중요 사찰로서 576년(위덕왕 13)에 공주가 성왕의 기복을 위하여 창건한 기복 사찰임이 확인되어 초창 시기와 목적 등이 분명하게 밝혀진 사찰로서 주목된다. 또한 목탑지와 금당지의 기단에 사용된 지대석으로 화강암을 정교하게 치석하고, 지대석 윗면에 단을 두어 면석이나 갑석을 올린 가구 기단임이 확인되어 6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주요 건물의 기단이 가구 기단을 갖추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여 능산리 사지의 중요성은 공방지에서 사비 시기 금속공예술의 절정을 보여 주는 백제 금동대향로의 출토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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