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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발 역모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517
한자 柳仁發逆謀事件
영어의미역 Conspiracy Event of Yu Inbal
이칭/별칭 칠서(七庶)의 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역모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612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613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조령[경상북도 문경시|충청북도 괴산군]
관련인물/단체 박응서|서양갑|심우영|이준경|박치인|박치의|김평손|이이첨

[정의]

1612년 신분 차별에 불만을 품은 충청북도 충주 출신 서얼 박응서 등이 주도하여 역모를 꾀했다가 발각되면서 계축옥사로 확대된 사건.

[역사적 배경]

조선은 서얼을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서얼들은 출세하는 데 제한을 받았으므로 서얼 출신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경과]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준경(李俊耕)·박치인(朴致仁)·박치의(朴致毅)·김평손(金平孫)은 모두 명문가의 자손이었으나 서얼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현실에 불만이 많았다. 이들은 일찍이 1608년에 서얼금고(庶孼禁錮)의 폐지를 주장하며 연명으로 소를 올린 적이 있으나,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경기도 여주의 북한강 근처에 무륜당(無倫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강변칠우(江邊七友)라 자처하였다.

이들은 유인발(柳仁發)과 교유하면서 반역을 도모하였으나 거사할 자금이 없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꾼, 소금장수, 노비추쇄인(奴婢推刷人)을 모아 화적질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12년(광해군 4) 조령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했다가 피살자의 노복인 춘상이 뒤를 추적해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듬해 일당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들의 검거는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이어졌다. 대북파(大北派)의 이이첨(李爾瞻)과 심복 김개(金闓), 김창후(金昌後) 등은 한희길(韓希吉), 정항(鄭沆) 등과 모의하여 거짓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 추대 음모를 꾸미고 국문 과정에서 이들에게 거짓으로 자복하도록 교사하였다. 이에 박응서가 비밀리에 소를 올려 옥사가 시작되었다.

박응서는 이들이 1608년부터 명나라 사신을 저격하여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군자금을 비축하여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했다고 하였다. 또 일이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수렴청정을 돕기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살인했다고 거짓으로 고변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종성판관 정협,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 달라는 유명을 받은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한준겸(韓浚謙)을 비롯한 일곱 대신 및 이정구(李廷龜), 김상용(金尙容), 황신(黃愼) 등 서인(西人) 수십 명이 감금되었다. 국문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유릉(裕陵)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하게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결과]

김제남은 사사되었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다. 영창대군은 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살해되었다. 주모자인 서양갑유인발은 능지처참에 처하고, 집을 무너뜨려 못을 파고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부친은 삭직되었다. 또한 충주 출신의 유인발이 주살됨으로써 충주목은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 박응서는 처벌을 면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주살되었다. 그 밖에 사건에 연루된 서얼 대다수는 불복한 채 죽었고, 박치의는 도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南人)들은 유배되거나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났다. 1618년에는 이 옥사를 빌미로 인목대비마저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됨으로써 이후 대북파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 사건은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순 강도범 박응서를 이용하여 역모를 조작한 무고한 옥사였음이 밝혀졌다.

[의의와 평가]

유인발 역모 사건은 서얼 차별이라는 조선 왕조의 기본적인 모순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사건 처리 과정에서 서얼 차별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반성이나 개혁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시 집권 세력인 대북파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의 하나를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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