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99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미숙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 역사.

[개설]

조선시대 충주는 1395년(태조 4) 지방제도가 개편된 후 충청감영의 소재지이면서 목(牧)으로서 대원(大原)·예성(蘂城)으로 불렸다. 관내의 호수는 1,871호이며, 인구는 7,452명에 이르고, 시위군 440명과 선군(船軍) 465명이 있는 대읍이었다. 1458년(세조 4)에 충주진(忠州鎭)이 설치되었으며, 그 관할 하에 청풍·단양·괴산 3곳에 군(郡)을 두고, 연풍·음성·영춘·제천 4곳에 현(縣)을 두었다.

[연혁]

충주는 1539년(중종 34) 유석(劉石) 사건에 의해 예성부(芮城府)로, 1549년(명종 4)에는 이홍윤(李洪胤)의 옥사로 인해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유인발(柳仁發)이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충원현(忠原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623년(인조 1) 복구되었다. 1628년(인조 6)에 안집중(安執中) 사건으로 다시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7년(인조 15) 복구되었다.

1644년(인조 22)에는 채문영이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과 연관되어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 1728년(영조 4)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1738년(영조 14)에 다시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1755년(영조 31)에 충주 사람 유수원(柳壽垣)심정연(沈鼎衍)의 옥사와 연루되어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65년(영조 41) 복구되었다. 1817년(순조 17)에는 채수영(蔡壽永)의 모반 사건으로 다시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26년(순조 26) 복구되었다.

이와 같이 충주는 여러 차례에 걸쳐 부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조선시대 충주의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되었다. 특히, 이홍윤의 옥사 때는 충주의 호구수가 감소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전기]

1. 경재소와 유향소

조선이 개국되면서 충주목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목사(정 3품)가 관할 행정구역 내의 행정·군사·사법에 관한 모든 일을 했으며, 판관(종 5품)과 교수(종 6품) 각 1명이 목사를 도와 업무를 추진하였다. 조선 초기에 재경 관인층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관직에 종사하면서도 경재소(京在所)를 통해 각기 소관 군·현의 유향소(留鄕所)와 긴밀한 종적 유대를 가지고 지방행정에도 관여하였다.

유향소는 재지 사족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운영되었으나, 점차 왕권의 대행자인 수령과 대립하여 중앙집권화과정에 역행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1406년(태종 6) 대사헌 허응(許應) 등이 상소를 올려 유향소 혁파를 건의하였다. 유향소는 세조의 전제정치와 관권 중심의 중앙집권화와 충돌함으로써 1467년(세조 13) 폐지되기도 하였다.

당시 유향소를 폐지한 것은 함경도 각관 유향품관들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가담하여 수령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광릉부원군 이극배(李克培)세조 때 충주 백성이 고을 수령을 고소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유향소에서 고소한 사람을 너무 심하게 억압한 일이 임금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폐지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 유향소는 1488년(성종 19) 수령치읍(守令治邑)의 보조기관인 군현의 이아(貳衙)로 정비되어 오히려 관권이 주도하게 되었다. 유향소는 조선 후기에 향청 또는 향소로 불렸으며, 그 조직과 권한은 시대 또는 군현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경재소와 유향소는 조선 초기 토성에 의해 장악되고 운영되었다. 충주의 토성은 서(徐)·석(石)·최(崔)·유(劉)·강(康)·양(梁)·진(秦)·안(安)·박(朴)·매(梅)의 성씨가 있다. 또한 조선 전기 유향소를 구성하고 충주에서 유력한 재지 사족으로 등장한 성씨는 34본의 성씨가 있다. 특히, 충주최씨·충주안씨·경주이씨·두원오씨·청주경씨·한양조씨·충주양씨 등이 두각을 나타낸 재지세력이었다.

2. 교육기관과 사고

조선 전기 충주의 교육을 담당한 대표적인 관학 교육기관으로는 1398년(태조 7)에 설립된 충주향교(忠州鄕校)가 있었다. 충주향교는 앞에 명륜당을 세워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뒤에는 공자와 유교의 뛰어나 학자들인 4성(四聖: 안자·증자·자사·맹자)과 4현(四賢: 주돈이·정호·정이·주희), 동방18현(東方十八賢)을 모신 대성전을 세워 문묘를 중심으로 한 교화 기능도 담당하였다.

대표적인 사학 교육기관으로는 서원이 있다. 팔봉서원(八峰書院)은 1672년(현종 13)에 사액을 받았다. 하강서원(荷江書院)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위덕을 기리기 위해 후대의 선비들이 세웠다. 이 서원들은 선현에 대한 제사, 인재 양성, 향촌민 교화를 담당하였다.

또한 충주는 사찰과 관청에서 서책을 간행할 정도로 인쇄 문화가 발전하였다. 1439년(세종 21)에 서책을 보관하는 충주사고(忠州史庫)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충주사고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다시 재건되지 못하였다.

3. 산업

충주의 농경지로서 토지는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절반씩 있었다. 경작지는 19,893결로 논이 3/10이 넘었으며, 나머지는 밭이었다. 농업 작물로 오곡과 팥·참깨·인삼·꿀·밀랍·모란을 재배했으며, 과일로는 대추와 모과가 부업으로 생산되었다. 자연 상태에서는 석이버섯·옻·지치·느타리버섯·주토·송이·사향·안식향·쏘가리 등이 채취되었다. 수공업으로 돼지털·족제비털·종이·자기·옹기 등이 생산되었다. 광업으로는 철·유황·활석 등이 채광되었다. 특히, 철은 충주의 중요한 생산물이었다.

4. 교통·통신시설과 조창

충주는 조령(鳥嶺)을 넘어 서울과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많은 물자와 사람들이 모이고 왕래하는 곳이었다. 이에 충주에는 교통시설로 역(驛)·원(院)·참(站), 통신시설로 봉수가 설치되었다. 역은 연원도에 소속된 14역이 설치되었고, 원은 13개소였으며, 참은 3곳으로 모두 보발이었다. 봉수는 6곳이 설치되었다. 충주는 제2로의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이 모두 통과하면서 경상도 연변의 급한 소식을 서울로 이어주는 인후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조창인 덕흥창(德興倉)이 설치되었다. 1404년(태종 4)에는 경원창(慶原倉)이 설치되어 세곡과 생산물을 보관하고 중앙으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1461년(세조 7) 화재가 발생하여 1465년(세조 11) 가흥창(可興倉)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가흥창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전세를 수납하여 조선 초기 전세 수납 범위가 가장 넓은 조창이었으나, 20세기 초에 폐지되었다.

[조선 중기]

1.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충주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한층 더 부각되었다. 조정에서는 충주를 보존하지 못하면 서울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 아래 명장 신립(申砬)을 파견하여 왜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신립의 군대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진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지휘자인 신립도 전투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적의 공격에 무모하게 돌진하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신립의 패배로 충주가 함락되면서 서울도 위험에 처하여 선조는 의주 방면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때 충주 사람들은 신립이 대군을 이끌고 충주에 왔기 때문에 이를 믿고 모두 피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충주는 다른 고을보다 인명 피해가 더 많았다.

2. 의병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침탈당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충주에서 활약한 대표적 의병장으로 백기장군 조웅(趙熊)을 들 수 있다. 조웅은 별시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사직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여러 지방에 격문을 띄워 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왜적을 맞아 싸워 승리하였다. 왜적을 물리친 전공으로 충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또한 조덕공(趙德恭)과 아우 조덕검(趙德儉)도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여러 번 물리쳤다. 숙부인 조복(趙服)도 늙고 병든 몸으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조선 후기]

1. 행정구역 개편

1602년(선조 35)에 충청도의 감영이 공주로 옮겨짐에 따라 조선 후기에 충주는 충청도 수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충주는 전기와 마찬가지로 그 관할 지역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다만, 청풍이 부(府)로 승격되어 소속되었을 뿐이다.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제로 고치면서 충주는 충주부(忠州府)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전국을 13도제로 개정하고 충청도를 남북으로 분리하여 충청북도의 수부를 충주에 정하면서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1909년(순종 3) 충주는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충주에 있던 도청을 청주로 이전했으며, 충주에는 군수를 두었다. 이때도 충주의 관할 지역은 변함이 없었다.

조선 후기 충주는 면(面)과 리(里)로 구성되어 있었다. 면의 수는 38개, 리의 수는 226개였다. 그러나 1909년(순종 3) 9월에 칙령 제49호로 지방구역이 새롭게 정리되면서 충주군에 속했던 12개면이 음성군으로, 1개면이 괴산군에 이속되었다. 이에 충주는 25개면만 관할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군·면·리·동 행정구역 통폐합 때 다시 14개 면으로 개편되었으며, 충주는 충주군 읍내면이 되었다. 1931년 4월 1일 읍내면이 충주읍이 되었다.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되고, 12개의 면은 묶어서 중원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1월 1일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하여 지금의 충주시가 되었다.

2. 인구와 교통로

충주의 인구는 조선 초부터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759년(영조 35) 편호 20,076호, 인구 107,693명으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후 점차 감소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1872년(고종 9)에는 편호 18,129호, 인구 45,456명으로 인구가 57.8%나 감소하였다.

1747년(영조 23) 이후 부연무역(赴燕貿易)이 엄금됨에 따라 중·일교역이 나가사키에서 직접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충주와 서울을 연결하는 조령로는 무역 상품의 유통로로서 그 역할을 상실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던 경상도 선비도 대폭 줄어들게 되어 일반인의 통행도 줄어들었다. 더욱이 1904년 경부선 철도가 준공되어 이전에 조령로가 했던 역할을 경부선 철도가 대행함으로써 조령로는 더욱 쇠퇴하였다.

정조 이후에는 호서 6읍의 세곡만 남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수송하게 되면서 충주의 조운도 점차 위축되어갔다. 영조 이후 평화가 계속되면서 충주의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도 점차 상실해갔다.

결국, 충주는 조선 전기에 정치·군사·문화의 거점 도시, 물산의 집산지,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조선 후기에 감영의 이전, 조령로의 쇠퇴, 남한강 수운의 위축으로 점차 인구도 감소하고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