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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224
한자 義兵
영어의미역 Righteous Army
이칭/별칭 의병전쟁,의병운동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이헌주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국가가 위급할 때 백성이 스스로 조직했던 자위군.

[개설]

의병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국한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우리 역사의 전 시기에 걸쳐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일어났던 민병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용어가 같다는 이유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말 의병전쟁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일어났던 다양한 성격의 의병이 동일하게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체로 한말 의병전쟁 이전의 의병이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근왕적 ‘충군애국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면, 한말 의병전쟁을 거치면서 차츰 근왕주의적 성격에서 탈각하여 국권수호운동, 나아가 독립전쟁으로 발전해 갔다고 할 수 있다.

[활동 시기]

1. 임진왜란기

임진왜란 시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승장 영규(靈圭)를 비롯하여 조헌(趙憲)·김홍민(金弘敏)·이산겸(李山謙)·박춘무(朴春茂)·조덕공(趙德恭)·조웅(趙熊)·이봉(李逢)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충주 지역 사람으로 활동한 이는 조덕공(趙德恭)조웅(趙熊)이다. 조웅은 여러 지방에 격문을 띄워 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앙성의 태자산 아래에 주둔하고 서울로 향해 올라가는 왜적의 후속부대를 막아 물리쳤다. 조웅은 기치를 모두 흰 것으로 표시하여 군호를 삼아 ‘백기장군(白旗將軍)’이라 불렸는데, 왜적들이 "백군과 홍군(곽재우 부대)은 피하라."고 할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2. 조선 말기

조선 말기 의병전쟁은 논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전기의병(1895~1896), 중기의병(1905~1907. 7), 후기의병(1907. 8~1909. 10), 전환기 의병(1909. 11~1914)의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의병은 척사위정운동을 계승한 유생들이 1895년 10월의 을미사변과 12월 단발령 공포 등에 반발하여 일으켰다가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무너지는 것을 계기로 해산한 의병이다. 유생의병장이 주도한 만큼 근왕적이고 척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에 강하게 저항한 반침략적인 성격과 함께 반개화적인 성격도 띠고 있었다. 전기의병을 대표하는 것이 유인석이 이끌었던 제천의병이었다.

중기의병은 일본이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을 강요하며 침략을 한층 노골화함에 따라 일어난 의병이다. 대체로 양반유생들이 의병전쟁을 주도했다는 점에서는 전기의병과 별 차이가 없지만, 전직관료 출신의 의병장이 많아졌다는 점과 활빈당·영학당 등의 활동을 전개했던 농민 항쟁세력과의 연대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상북도와 강원도 접경 지대를 중심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던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활동이 새로운 현상으로 눈길을 끈다.

후기의병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해산군인 일부가 기존의 의병투쟁에 결합함으로써 규모와 전술 면에서 커다란 도약이 이루어졌던 의병이다. 해산군인의 가담으로 무기와 병력이 크게 강화된 전국의 의병부대는 서울 진격을 목표로 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한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는 서울 탈환을 위해 1908년 1월 말 경기도 양주에 1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기도 하였다. 국권 상실 위기에 직면한 1908~1909년 사이에 의병 참가자와 일본군과의 교전 횟수가 급증하였는데, 1908년 후반에만 일본군과의 교전 횟수가 1,900여 회, 참가 의병수도 약 8만 3000명에 달하였다.

전환기 의병은 1909년 11월 일본군에 의해 진행된 의병말살작전이었던 소위 ‘남한대토벌’ 작전에서 1914년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의병항쟁을 말한다. 이 시기 의병들은 일본군의 악랄한 탄압에 밀려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새로운 항쟁기지를 찾아 나섰고, 이를 기반으로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보다 완강한 독립전쟁을 감행해나가게 되었다.

[충주 지역 의병 활동]

충주 지역에서 벌어진 의병전쟁은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병 활동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전기의병을 대표하는 제천의병은 1896년 1월 28일 결성되어 조직 정비가 마무리된 직후부터 충주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충주는 중부권 20개 군을 관할하는 관찰부로서 정치적 의미가 컸고, 내륙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이었기에 선점할 필요가 있었다.

철저한 사전 준비 끝에 2월 17일 주력부대 수천 명을 동원하여 충주성의 북쪽을 기습하고 별동부대로 하여금 남동쪽을 협공하게 하여 저녁 무렵에는 충주성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충주성에 입성한 제천의병은 관찰사 김규식을 잡아 처단하는 한편, 안동의병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충주부(忠州府)를 중심으로 중부 지역 일대를 장악하는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충주성 함락 직후인 2월 18일부터 수안보와 가흥에 병참기지를 둔 일본군과 관군의 충주성 탈환작전이 시작되었다. 의병진에서는 일본군의 충주 접근을 막기 위해 한강과 달천을 경계로 수비망을 구축하고 방비를 엄히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을 동시에 상대하여 충주성을 지켜내는 일에 승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국면 타개를 위해 이춘영의 건의에 따라 일본군의 병참선, 통신선을 끊기 위해 수안보 공격에 나섰지만 실패하였다.

3월 2일에는 남문에서 전투를 독려하던 참모장 주용규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는 타격을 입기도 했다. 충주성 점령 이후 15일 동안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맞서 용전했지만 점차 증강되는 적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3월 5일 제천의병은 충주성 동문을 빠져나와 마치(馬峙)를 넘어 청풍을 거쳐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제천으로 물러난 후 의병진에서는 수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세적 방어 차원에서 가흥 전투와 수안보 전투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제천의병의 이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5월 25일 제천 남산 전투에서 패할 때까지 3개월 가까운 제천의병의 항전은 제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사실상 교통의 요충인 충주를 포기하고 협소한 제천으로 물러나 수성전을 펼치기로 전환하면서부터 이미 패배는 예견되고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웅의 의병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여 활동하였고, 보급로 확보의 필요성으로 일본군에 의해 조웅이 순국하면서 의병활동은 끝이 났다. 한말 의병전쟁은 초기 단계에 척사위정론에 기반을 둔 반침략운동의 성격을 띠었지만, 양반 중심의 봉건적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했다. 그러나 의병전쟁에 민중세력이 결합하면서 점차 반침략 운동이자 반봉건 투쟁의 성격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후 독립전쟁으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결국 의병전쟁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국권침탈에 맞서 유생 중심의 척사위정 계열의 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맥을 잇는 민중운동이 결합하여 전개했던 항일무장투쟁의 선구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대단히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병전쟁은 마지막 단계까지 봉건적 지배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한 양반 유생층의 지도노선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이는 의병전쟁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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