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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227
한자 獨立運動家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Fight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구완회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거나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후 일찍이 중부권 문화의 선진 지역이었고 의병항쟁의 고향이었던 충주에서는 다양한 갈래의 항일운동이 그치지 않았다. 당시의 항일운동은 결국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10년대~1920년대 전반]

일제의 무단통치기에 엄정섭(嚴正燮)은 충주 출신으로 광복단에 가입하여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3·1운동 초기에 이병철(李秉徹)[기독교인, 23세]과 박신삼(朴信三)[경성사립배화여학교 학생, 18세]은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 청주에서는 서상경(徐相庚)[청주농업고등학교, 20세], 음성에서는 추성렬(秋成烈)[잡화상, 32세]이 만세운동에 가담했으며, 개성에서는 충주 출신의 여성인 어윤희(魚允姬)가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충주에서의 만세운동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전개되었다. 3월 10일을 전후하여 홍종호(洪鐘浩)·김흥배(金興培)가 달천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충주간이농업학교의 유흥식(柳興植)[27세, 유자명과 동일인]·오언영(吳彦泳)[농업, 19세]·장천석(張千石)·유석보(劉錫寶) 등은 운동을 기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4월 초에는 용원장터에서 단경옥(段慶玉)[잡화상, 26세]·이희갑(李喜甲)[농업, 24세]·한태억(韓泰億)[농업, 26세]·이강렴(李康濂)[학생, 18세]·손승억(孫承億)[농업, 26세]·윤무영(尹務榮)[농업, 23세]·윤복영(尹福榮)[농업, 36세]·이강호(李康滈)[농업, 25세]·김은배(金殷倍)[농업, 28세] 등 신니면 청년들이 가담하였다. 그 밖에도 김종부(金鐘富)[기독교인, 무직, 27세]·장양헌(張良憲)[기독교인, 학생, 22세]·최명희(崔明熺)[기독교인, 농업, 27세]·최봉기(崔琫基)[농업, 26세]·권태은(權泰殷)[농업, 22세]·박찬병(朴燦秉)[23세] 등 주로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된 만세운동이 계획 단계에서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간 예가 있다.

이병철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외곽 조직인 청년외교단을 주도적으로 조직했으며, 그와 함께 충주 출신의 정락윤(鄭洛倫)[35세]·유흥환(柳興煥)[22세]·유흥식·정석희(鄭錫熙)·윤우영(尹宇榮)[서당교사]·정태영(鄭泰榮)[고용인, 32세]도 활동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 유학하던 홍승로는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를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하였으며, 임시정부 계열과 다른 쪽 운동가로는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한 유돈상(柳敦相)이 있다. 1922년에는 주진황(朱鎭晃)[22세]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대 중반]

1920년대 중반은 사회주의운동 또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 주목되는 시기이다. 1926년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과 깊은 관련 속에서 추진되었다. 박한복(朴漢福)[중동학교 3년, 25세]·홍명식(洪明植)[연희전문 1년, 23세] 등이 이와 관련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한인석 등이 신간회 충주지회를 건립하면서 일제의 주목과 감시를 받았다.

1928년 5월 김현국(金顯國)·권오순(權五淳)·안동규(安東奎)·김학원(金學元)·정진복(鄭鎭福)·서정기(徐廷夔) 등 아나키즘 운동가들 조직원들이 대거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가 인류의 절대 평등과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반제국주의운동에 나섰던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다. 국외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인물로는 유자명(柳子明)이 있다.

[1930년대 이후]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은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엄중한 감시로 전시 동원 체제 아래에 있었다. 이때 적색노조 및 농조를 조직하던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의 가장 중요한 경계 대상이 되었다. 주진황도 이 무렵 좌파 운동가가 되어 있었으며, 김삼룡(金三龍)은 이쪽 계열의 대표적인 인물로 비밀 공산주의 단체인 경성콤그룹을 이끌었다. 그 밖에 1933년 조금용(31세), 조휘창(趙彙昌), 조창희(趙昌熙), 조금순(趙今順)은 치안유지법으로 2년간 복역하였다. 한편, 1933년 유석현(劉錫鉉)[26세]은 의열단에서 조직한 남경군관학교에 들어갔으며, 권태응(權泰應)은 일본 유학중 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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