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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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활약하다 순절한 무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 또는 외암(畏菴). 아버지는 찰방을 지낸 김훈(金壎)이며, 아들은 영의정을 지낸 김류(金瑬)이다. 김여물은 어려서부터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하고 구속받지 않는 성품으로,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했으며 장수의 재략도 있어 문무를 겸비했다. 1567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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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공납제(貢納制)를 폐지하고 대신해서 제정·실시한 재정제도. 대동법은 조선 전기 조세제도 중 호역(戶役)으로 부담하였던 세납(稅納)을 토지세로 전환하는 제도이다. 즉 조선 전기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형태로 운영되던 공납제는 방납(防納)의 성행, 지주제의 확산, 공납제 부담의 불균형 등으로 인해 큰 폐단을 야기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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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충주는 가장 희생이 많았던 싸움터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 장군은 탄금대 앞에서 달천과 남한강을 뒤로 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8,000여 명의 조선군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희생이 큰 전투였다. 또한 충주읍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 즉 사민(士民)과 관속(官屬)들이 당대의 명장인 신립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믿고 피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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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조선을 침입한 왜군과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의 전쟁 1592년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포에 이어 동래를 점령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여, 상주 전투에서 이일(李鎰)을 격파하고 충주에서 신립(申砬)을 깨뜨린 뒤 이렇다 할 전투도 치르지 않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가고, 조선은 7년 동안 일본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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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일대에 있던 조선시대 읍성. 충주읍성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치른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고 대오와 군저를 확장하고 포수를 배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명을 받고, 1869년(고종 6) 2월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읍성을 개축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완성하였다. 이때 개축된 성의 둘레가 3950척, 두께 25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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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시행된 지방 군제. 조선 전기의 지방군은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으로 대별되고, 육수군 안에는 일반 농민들이 군역으로 번상숙위(番上宿衛)하는 시위패(侍衛牌)와 영진군(營鎭軍), 수성군(守城軍) 등이 있었다. 영진군은 마병으로, 수성군은 주로 보병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그 대우도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이외에도 능이나 특수 지역을 방어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