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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67
한자 豪族
영어의미역 Local Gent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최일성

[정의]

신라 후기부터 고려 전기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사회 변동을 주도하며 존재한 지방 세력.

[개설]

신라 하대에는 중앙 귀족들의 정권 다툼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호족이라는 새로운 지방 세력이 대두하였다. 호족은 몇 가지의 부류로 구분된다. 중앙 귀족들의 정권 다툼에서 패배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정착한 경우, 지방의 토착세력이던 촌주(村主)들이 성장한 경우, 청해진의 장보고(張保皐)나 강주(康州)[현 진주]의 왕봉규(王逢規)로 대표되는 해상 세력의 경우, 견훤(甄萱)과 같은 군사 세력의 경우, 초적(草賊)·군도(群盜) 세력의 경우 등이 있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 태조는 삼한공신의 등급을 나누고 신흥사(神興寺)를 중수하여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벽에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붙였다. 이때 3,200명에 달하는 공신의 등급 책정과 함께 전국 군현에 토성이 분정된 것으로 보인다. 마치 본관이 국가에 의해 정해지듯 고려왕조 창건과 후삼국 통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소 호족이 출신지 군현에 토성으로 지정되면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소재 군현의 토성은 이때를 기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토성으로 보는 호족 세력 현황]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충주의 토성은 서(徐)·석(石)·최(崔)·유(劉)·강(康)·양(梁)·진(秦)·안(安)·박(朴) 9개 성이다. 이 성씨들은 모두 충주의 호족으로 볼 수 있다. 충주석씨는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장군 동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진 석린(石鄰)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충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충주석씨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충주의 호족으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최씨최승(崔陞)을 시조로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내동마을에 세거하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토성으로 기록되고, 그 후의 지리지에도 계속 기록될 정도로 충주의 중요한 성씨였다. 고려 때 최율(崔律)·최유(崔儒)·최충나(崔忠奈)·최정나(崔貞奈)·최양경(崔讓卿) 등이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충주최씨충주유씨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진 호족으로 추정된다.

충주유씨는 충주의 대표적 호족으로 궁예정권시대에 이미 호족으로 성장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유긍달의 딸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와 혼인함으로써 충주유씨는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충주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호족으로 성장하여 고려 전기에 문명을 드날렸다.

신명순성왕태후는 태자 태(泰)·정종·광종·문원대왕(文元大王)·정증통국사(貞證通國師)·낙랑공주·흥방공주를 낳았다. 정종광종이 왕위에 오를 때도 외가인 충주유씨의 세력이 뒷받침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덕종의 비인 유씨도 유총거(劉寵居)의 딸이며, 시랑 유권열(劉權說), 순군낭중 유길권(劉吉權), 태사 유신성(劉新城)현종 때의 문하시중 유진(劉瑨)충주유씨다. 왕후나 비빈으로 유씨 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가 충주유씨 출신일 정도로 충주유씨는 왕실의 외척 가문으로 불렸다.

충주양씨는 삼중삼한대장군(三重三韓大將軍) 예성군(蘂城君) 양능길(梁能吉)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양능길은 삼한대장군이므로 고려 태조 때의 장군으로 추정되며 충주의 호족이다. 충주박씨의 시조인 박영(朴英)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둘째 아들(또는 다섯째 아들)인 사벌군(沙伐君) 박언창(朴彦昌)의 후손으로 상주박씨에서 분관(分貫)했다는 설이 있다. 박영은 고려시대 첨의정승에 오른 박원정(朴元挺)의 둘째 아들로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충주에 세거하여 충주로 분관을 삼게 되었다고 하나, 충주박씨도 충주의 호족이다. 그 밖에 서(徐)·강(康)·진(秦)·안(安)의 성씨도 충주의 호족이나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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