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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66
한자 高麗時代
영어의미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최규성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시 역사.

[지명의 변천]

충주란 고을 이름은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940년(태조 23) 전국의 군·현을 개편하고 주·부·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중원부(中原府)를 고쳐 부르면서 나타났다. 충주란 명칭은 이 지역 인사들이 태봉시대부터 태조 왕건의 우익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변함없는 충성(忠誠)을 바치고 큰 공헌을 한 것을 기리는 의미로 특별히 내린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충주는 983년(성종 2) 전국의 주요 도시에 처음으로 12목(牧)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할 때 충주목(忠州牧)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 12절도사(節度使)체제로 개편하면서 충주는 창화군(昌化軍)이 되었다. 이에 이어 전국을 10도(道)로 나누는 10도제를 실시하면서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도(中原道)가 형성되어 충청도의 성립 토대가 마련되었다.

1012년(현종 3) 12절도사체제를 폐지하고 5도호(都護) 75도(道) 안무사(按撫使)체제로 개편되면서 중원도는 사라졌다. 1018년(현종 9) 안무사를 폐지하고 4도호 8목을 두면서 충주는 다시 충주목이 되었다. 그후 5도양계제가 실시되고 고려의 지방관제 개편이 일단락되면서 충주목양광도에 속한 중부 내륙 지역의 대표적인 큰 고을로 발전해갔다.

13세기에 들어 몽고군의 침입으로 벌어진 40여 년의 여·몽전쟁기에 충주는 남하해온 몽고군을 여러 번 격퇴하여 삼남 지역민을 도탄에서 구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1254년(고종 41)에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삼게 되었다. 충주란 명칭 외에 성종대에는 대원(大原)이라는 별호를 얻기도 하였다. 이 별호는 충주가 태조 이래 고려 왕실의 중요 기반이 된 대표적인 도시라는 점과 함께 광종정종의 외가가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고려국의 대원으로서 충분한 조건을 구비한 지역임을 강조하여 내린 호칭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예성(蘂城)이라는 별호가 있으나,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별호는 충주가 정토사(淨土寺)를 비롯한 개천사, 사자빈신사 등 이름난 절들이 번창하고, 태조 왕건의 존숭을 받은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를 비롯한 명승들이 다수 배출되어 고려 초기 불교가 성했던 지역이었던 점을 고려하여 지은 호칭일 가능성이 크다. 고려시대 군현제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인 계수관(界守官)제도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주요 주·군들이 각기 수개의 영현(領縣)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때 충주에는 1군5현이 소속되었고, 1지사군(知事郡)을 관령(管領)하게 되었다.

[고려 전기]

통일신라시대 5소경의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이 설치되었던 충주는 신라 하대의 혼란기를 거쳐 후삼국시대를 맞이하면서 중원부로 재편되었다. 이때 충주는 청길(淸吉)을 비롯한 유긍달(劉兢達) 등 지방 세력이 장악하는 지역으로 변하였다. 후고구려가 건국된 후 왕건궁예왕의 명을 받아 한강 중·상류 지역을 정벌할 때 궁예군이 충주 일대를 점유하면서 충주는 후고구려의 강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후 왕건유긍달의 딸이 결혼함으로써 두 집안이 굳게 결합하게 되었다. 유긍달의 딸은 충주유씨로 뒤에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로 봉해진 인물이다. 이로써 충주는 궁예 말년에 왕건의 중요한 지지 기반의 한 곳이 되었다. 당시 충주유씨 가문은 철장(鐵場)과 막강한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충주유씨 가문은 왕건의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함으로써 충주는 태조 왕건이 특별히 친근한 곳으로 생각하여 관리하는 지역이 되었다. 그 결과 후삼국 통일 후 충주란 주호(州號)를 얻게 되었다.

태조가 사망한 후 왕자들 사이에 정권 쟁탈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충주유씨 가문을 외가로 한 정종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왕규(王規) 일당을 제거하고 정국을 안정시켰다. 이어 광종이 다수의 공신과 지방 세력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고려초기 충주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고을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충주유씨 가문 출신의 유권열(劉權說)을 비롯하여 염상·유신성·유징필·유진 등 출중한 인재들 다수가 고려 조정에 진출하여 국정을 맡았다. 그 결과, 고려 조정에서 유씨(劉氏) 성 쓰는 인사 모두는 충주유씨 가문 출신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결국 충주는 정종광종 이후 풍패지지(豊沛之地)로 인식되어 고려 왕실이 중시하는 지역이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충주 지역민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강한 애국심과 함께 왕경인(王京人)에 버금갈 정도의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최근 광종이 모후(母后)를 위해 창건한 충주 숭선사지(崇善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사찰의 장대한 규모와 유물의 화려함이 확인되었다. 이것으로 광종이 모후를 위해 지은 원찰에 대한 정성과 충주를 중시한 점을 짐작할 수 있다. 1009년(목종 12) 강조(康兆)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할 때, 목종이 천추태후가 탄 말고삐를 스스로 잡고 충주를 향해 낙향하기를 희망한 것도 이러한 충주의 역사적 연원과 무관하지 않다.

이후 충주는 고려의 대표적인 지방 도시의 하나이면서 왕실과 결합된 충성스런 고장으로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11세기에 일어난 고려의 첫 번째 국난인 거란과의 싸움에서도 충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로 현종의 거란 퇴치를 기원하기 위해 월악산 송계 계곡 내에 사자빈신사지탑을 세웠다.

[고려 후기]

충주가 고려에 충성하는 고장이란 자랑스러운 명호에 걸맞게 활약한 시기는 40년 가까이 전개된 여·몽전쟁기다. 1231년(고종 18) 살리타가 이끈 몽고군의 갑작스런 침입으로 고려의 군현이 힘없이 무너질 때 충주민만은 좌절하지 않고 완맹한 몽고군과 맞서 싸워 몽고군을 퇴치하는 위업을 이루었다. 특히, 1253년(고종 40) 야굴대왕으로 불리는 야쿠가 이끈 몽고군의 제5차 침입이 있을 때는 몽고군이 가는 곳마다 폐허와 죽음만이 남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충주산성의 충주민은 일치단결하여 70일간이나 끈질기게 싸워 몽고군을 격퇴하였다.

충주산성 전투의 승리는 충주민만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고려의 자존심을 지켜낸 특기할 만한 역사적 사건으로 삼남 지역의 사람들을 몽고군의 말발굽에서 구해낸 역사적인 위업으로 평가된다. 고려 조정은 그 공훈을 특별히 기려서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말기 왜구의 침입으로 남해안뿐만 아니라 동해안과 서해안 일대가 황폐해지고, 수 십 리를 가도 사람이 사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때 충주 일대는 안전한 곳을 찾아 피신하는 삼남 지역 사람들의 피난지로서 기능하였다. 또한 바닷길이 막혀 조세로 받은 곡식을 조운해가기가 어렵게 됨에 따라 고려 조정에서는 영남 내륙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한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경사로 운반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충주는 덕흥창(德興倉)이 설치된 내륙 수운의 출발지가 되어 물산이 모이고 경제가 발전하는 고장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산업과 유통 경제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던 도자기 공예가 충주 지역에 꽃피게 된 것도 충주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노은면 일대를 비롯한 여러 곳에 남겨진 분청사기 요지 역시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고려 시기 충주는 지덕(地德)이 왕성한 곳으로 인식되어 삼소(三蘇)의 하나로 정해진 후 역대 왕들이 와서 머무는 곳이 되었다. 충주가 삼소의 하나로 정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공민왕이 흥국사와 법왕사에 행차하여 내린 교서에는 “옛날 우리 태조께서 매양 사중(四仲)의 해를 당하면, 삼소에 순주(巡駐)했으니 나도 장차 평양에 거동하여 금강산을 돌아서 충주에 거가를 멈추리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충주는 평양과 금강산보다 먼저 삼소의 하나로 정해져 국왕이 순주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에는 “평양과 충주에 모두 이궁(離宮)과 공주의 혼전(魂展)을 지어 곡식을 저비(儲備)하고 음식을 공급하므로 백성이 심히 이를 괴롭게 여겼다”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공민왕대에 충주에는 국왕이 순주하여 머무를 수 있는 이궁과 함께 왕비의 혼전, 즉 노국대장공주의 혼전이 마련되어 삼소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충주가 안전하고 신령스러운 곳으로 인식됨으로써 우왕 때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위태롭게 된 보주(甫州)[지금의 예천]에 소장된 사적(史籍)들을 충주 개천사(開天寺)로 옮겼다. 1390년(공양왕 2)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죽주가 위태로워짐에 따라 죽주 칠장사에 두었던 국사(國史)를 다시 충주 개천사로 옮겨 보관하도록 함으로써 충주는 고려시대 사고지(史庫地)의 한 곳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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