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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산성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74
한자 忠州山城戰鬪
영어의미역 Battle of Chungjusan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안림동 산 56-1지도보기|직동 산24-1지도보기|목벌동 산 54지도보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최규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253년 10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253년 12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주산성
관련인물/단체 김윤후|야굴|아모간|홍복원

[정의]

1253년(고종 40) 10월부터 12월까지 충주산성에서 충주민이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전투.

[역사적 배경]

몽고는 그 동안 고려를 네 차례나 침략했지만 고려 왕실의 환도를 실현시켜 실질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데 실패하자, 1253년 7월 야굴(也窟)을 대장으로 제5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경과]

1253년 7월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 수십만은 고려 동부와 서부 지역을 유린한 뒤 남하하여 양광도와 교주도 일대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몽고군은 고려 서북부 지역을 유린하고 동주산성과 천룡산성을 차례로 함락한 다음 10월에 그 여세를 몰아 삼남 지역까지 석권하기 위해 영남으로 내려가는 요충인 충주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에 나섰다.

충주산성 방호별감 김윤후는 군사를 격려하여 “만일 죽기를 각오하고 힘써 싸운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관작을 제수하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관노들의 부적(簿籍)을 불태워 믿음을 보이며, 노획한 말과 소를 나누어 주어 사기를 북돋자, 군관민이 하나로 뭉쳐 죽기를 맹세하고 싸웠다.

몽고군의 공격은 70여 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맹공을 퍼부었으나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몽고에서는 충주산성 공략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야굴을 전투 도중에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야굴을 대신하여 아모간과 홍복원이 지휘하여 계속 공격을 시도했지만 도저히 함락시킬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결과]

몽고군이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가자 고종충주산성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도운 월악산신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리면서, “만약 충주의 주민들이 충주산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몽고군을 물리치지 못하였다면 삼남의 인민이 몽고군에 의해 어육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주민들의 공을 높이 치하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또한 전승의 공로를 치하하여 김윤후를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으로 승진시키고, 그 밖에 군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노와 백정에 이르기까지 공에 따라서 차등 있게 관직을 주었다.

[의의와 평가]

방호별감 김윤후가 군관민과 노비들의 사기를 높이고 애향심과 애국심을 고양시켜 충주산성을 방어함으로써 전략적으로 중요한 충주 일대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몽고군의 남하를 저지하여 삼남 지역의 안전도 지켜 낼 수 있게 되었다. 충주산성 전투 과정에서 김윤후가 군관민과 노비들의 사기를 높여 합심하여 결사 항전할 수 있도록 한 조처는 지도자의 자질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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