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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역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502
한자 均役法
영어의미역 Equalized Tax Law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750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1752년연표보기
시행처 균역청

[정의]

조선 후기 영조 때 양역제(良役制)의 개선을 위해 충주 지역에서 실시했던 재정제도.

[개설]

조선은 천인을 제외한 신분, 즉 양반을 비롯한 모든 양인에게 양역이라는 일종의 역역(力役)을 부과하였고, 이는 주로 군역(軍役)이었다. 그런데 점차 직접 군역을 지는 대신 포(布)를 바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양반이 군역에서 제외되었고, 또 각종 군영이 창설되면서 일반 군역보다 포의 부담이 작은 역이 나타나면서 경제력이 있는 이들은 이러한 군역으로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양역부담자의 수가 줄어들었고, 그만큼 양역은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이처럼 양역이 제도 자체의 모순과 운영상의 결함 등으로 민폐를 야기함은 물론 사회의 동요까지 초래하게 되자 그 대책이 오랫동안 여러 면으로 논의되었으나 쉽게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1750년(영조 26) 결국 모든 양역의 부담을 포 1필로 균일화함과 동시에 그에 따른 재정결손의 보완책 마련에 착수, 1년 여의 논의 끝에 마침내 1752년(영조 28) 어염세(魚鹽稅)·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은여결세(隱餘結稅)·결전(結錢) 등의 새로운 세금을 통해 보충토록 하는 내용의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제정경위 및 목적]

균역법을 시행한 구체적인 목적은 부담이 큰 양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양역변통과 관련한 논의는 일찍부터 있었다. 그 내용은 크게 대변통론과 소변통론으로 나뉜다. 소변통론은 임시방편적인 대책으로서 군사수를 줄이거나 군문을 축소하는 것, 혹은 양역 때문에 납부하는 포의 수를 줄여주는 방식이었다.

대변통론은 양역의 부담이 큰 이유가 소수의 양인만이 양역을 부담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파악하여, 부담자의 수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호에 포나 돈을 부과하자는 호포(전)론, 모든 남정에 부과하는 구포(전)론, 토지에 부과하는 결포론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대변통론에 의한 방법은 양반과 상민(常民), 이른바 반상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라는 반발이 심해 시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일종의 타협책으로서 모든 양역의 부담을 포 1필로 균일화시키는 방식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런데 포1필로 부담을 줄이게 되면 막대한 재정결손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하였다.

영조 이후의 양역 논의는 주로 감필과 그 재정보완책의 모색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750년(영조 26) 5월 호조판서 박문수는 양역변통을 위해 호전제를 시행하자고 하였다. 이 주장은 예상을 초과한 호당징수량(戶當 徵數量)의 산출과 호적법의 미비로 결국 무산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감필을 하고 부족분을 호전으로 충당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7월 영조는 전격적으로 양역의 부담을 반으로 줄여 1필로 균일하게 하는 내용의 감필을 단행하였다.

균역법의 첫 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감필이 단행된 이상 그에 따른 재정결손을 보완할 대책의 마련이 시급해졌다. 이에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을 책임자로 하고 신만(申晩)·김상로(金尙魯)·김상성(金尙星)·조영국(趙榮國)·홍계희(洪啓禧)를 실무자(句管堂上)로 하는 균역절목청(均役節目廳)이 설치되어 감필에 따라 줄어든 만큼의 비용을 해당 관청에 보충하는 급대책을 강구하였다.

급대에 필요한 재원은 총계 100만 냥 정도로 추산되었으나 당시의 빈약한 세정상황에서 이를 조달하기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우선 각 군영의 규모 축소와 군사 수의 감축, 군사시설의 병합, 각 관청의 재정지출 절약 등에 의해 급대할 상당량을 상쇄하였다.

그런 다음 나머지는 왕족이나 궁방(宮房)에 주어져서 세원(稅源)에서 제외되었던 어염세를 다시 국고(國庫)로 환수하고, 양반이 아니면서도 양역의 부과대상에서 빠져 있는 피역자 내지 한유자(閑遊者)에게 일정한 비용을 징수하며(選武軍官布), 그 동안 관행적으로 지방 수령의 사용(私用)으로 묵인되어 오던 은결(隱結)·여결(餘結)에서의 수입을 국가로 돌리는 등의 새로운 세원(稅源) 포착에 의해 급대재원을 확보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고도 부족한 액수는 각 고을에 일정량을 할당하여 징수하는 분정(分定)의 방식을 취하기로 하는 방안이 일차적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궁방이나 한유자·수령 등 실리(失利)하게 된 쪽의 반발이 심하게 일어나고 불합리한 분정방식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어났다.

결국 홍계희의 주장에 따라 분정을 폐지하는 대신, 기존의 토지 세금에 1결당 쌀 두 말씩을 부가하는 결미(結米) 조항을 신설하고, 처음에 마련된 어염세·선무군관포·은여결세 등의 급대재원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감필이 단행된 지 1년 여 지난 1751년 9월 균역사무를 담당할 관청으로서 균역청을 옛 수어청 자리에 설치하면서 비로소 균역법은 정식으로 시행을 보게 되었다.

[내용]

균역법의 내용에는 감필균역(減疋均役)과 그에 따른 재정결손을 보완하기 위한 대책의 두 가지가 포함된다. 우선 감필균역은 단순한 감필에만 그치지 않고 종전의 약간씩 차이가 있던 양역 부담량을 1필로 통일하여 균일하게 한다는 것인데, 감필의 시행과 함께 모든 양역 명목의 부담이 1필(돈으로 낼 때는 2냥)로 재조정되었다. 충주의 양인들도 모두 1필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

재정결손을 위한 대책으로 충주에서는 크게 결전과 선무군관포, 선세전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충주에 부과되었던 결전은 4,842냥 5전 8푼이었고, 선무군관포는 420필, 즉 420인의 선무군관이 차정되었다. 그리고 선세전 54냥 5전이 부과되었다. 1794년에 작성된 『부역실총(賦役實摠)』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보인다. 선무군관포는 수량에 변함이 없고, 결전은 5662냥 1전 8푼, 선세전은 39냥 5전이 부과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균역법은 조선 후기 사회의 중요한 폐단이었던 양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감필을 통해 농민 부담을 약간 줄여준 데 불과하였다. 이것마저도 당시의 군포징수가 실제로는 매정(每丁)단위가 아니고 촌읍(村邑)단위였으므로 실제 혜택이 얼마만큼 있었는지 의문이다.

균역법 실시 직후 바로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삼정(三政) 중의 하나로서 군정의 문란이 말기까지 그 폐단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은 균역법의 성과가 크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또 균역법의 실시로 인한 재정 결손 부분을 양반보다는 새롭게 성장하던 계층에 선무군관포를 부과하는 형태로 해결했다는 점에서도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종래 약간씩 차이가 나던 양역의 부담을 감필을 통해 1필로 균일화함으로써 불균등한 부역부과를 시정하려 하였고, 결미의 실시로 일부이기는 하나 막연한 노동력을 단위로 했던 인두세(人頭稅)가 실질적인 생산력을 가진 토지로 전환됨으로써, 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세금의 부과에 의하여 조세징수의 합리성을 기할 수 있었다는 점, 부차적이지만 급대재정(給代財政)의 마련을 위하여 비로소 전국적인 양정수의 파악이 시도되었다는 점은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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