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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507
한자 忠淸監司
영어의미역 Chungcheong Superintendent
이칭/별칭 방백,도백,도신,외헌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시기 1395년연표보기
관품 종2품

[정의]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사법·행정·군사적 권한을 지닌 종2품 관직.

[개설]

조선 초기에는 일반 행정과 군정이 구별되어 있었으나, 태종 이후 감사가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순찰사를 겸하였다. 또한 감영 소재지의 부윤(府尹)이나 목사(牧使)의 직책까지도 겸하게 됨으로써 그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도의 행정, 사법, 군사의 전반을 통괄하고 관할구역 내의 여러 수령을 감독하는 방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감사는 본래 일정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책임지고 있는 지역을 순회 감시 하는 것이 본무이기 때문에 이들은 반드시 순찰사를 겸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가족을 대동하는 것은 임기가 긴 서·북 양도 이외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영이 생기고 가족을 대동하게 되면서 고정된 행정사무관으로 변했다.

감사는 원칙적으로 종2품으로 임명하게 되어 있었으나 정2품 이상인 자가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고, 충청·강원·황해도 등에는 종종 음관(陰官)이나 무관(武官)이 임명되기도 했다. 또 이들은 출신지에는 임명되지 못하였고, 그 임기도 1년으로 제한되었다. 충청감사가 관할하던 지역으로 목(牧)은 4, 군(郡) 11, 현령(縣令) 1, 현감(縣監) 39로 현재의 충청남북도와 거의 동일한 지역이 확정되었다. 이때 확정된 지역은 큰 변동 없이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지속되었다.

[제정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개국 초에는 고려시대의 지방조직을 그대로 답습하고, 직제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므로 국가의 권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행정체계를 일원화해야 할 필요성을 안고 있었다. 이에 1395년(태조 4)에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치고, 양광도를 충청도, 서해도를 풍해도,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로 고쳤다.

이어 양주·광주 및 관할하던 군현들을 떼어내어 경기에 소속시킨 다음 공주·홍주를 합해 충청도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통치를 담당한 외관 즉 수령(守令)들을 파견하였다. 또한 이들에 대한 감독과 지휘를 총괄하면서 도내의 민정·군정 및 사법 등의 전권을 행사하는 지방최고 행정장관으로 관찰사(감사)를 두었는데, 충청도의 관찰사는 충주에 두었다.

[담당직무]

감사는 도내의 민정·군정·형정 등을 통괄하고 관하의 수령에 대한 지휘감독의 권한을 국왕으로부터 위임받아 직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중앙의 명령을 각 지방의 수령에게 하달하고 수령의 각종 보고를 중앙에 상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감사의 중요한 직무는 관내의 수령을 규찰하고 고과(考課)를 담당하는 일로서 수령에 대한 직계권(直啓權)과 포폄권(褒貶權)이 있었다.

따라서 감사는 목민관인 지방 수령이 수령 7가지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를 직접 감독하기 위해 각 고을을 순력하였다. 감사의 순력은 단순한 감독과 민정시찰이 아니라, 현장에서 각종의 관문(關文)과 보첩(報牒) 등의 공무를 처리하였고 순력하는 고을과 주변 고을의 보고와 재결 사항도 처리하였으므로 순행에는 수행원과 실무진인 영리(營吏)가 함께 이동하였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폐단도 컸으므로 정조 이후 감사의 순력은 춘추에 1회 정도 권농·진휼 등에 역점을 두었고 일상적인 업무는 감영에서 주로 수행하였다. 감사의 주요 민정으로는 권농(勸農), 진휼(賑恤), 시취(試取), 수세(收稅), 재정행정(財政行政)을 들 수 있다.

군정으로는 병사(兵使) 또는 수사(水使)를 겸하고 병부를 발하는 권한이 있었으며, 지방군 통수권자로서 직무를 가졌다. 그리고 형정에서는 유형(流刑) 이하를 직단하는 권한이 있었으며, 관내의 모든 범죄는 수령의 보고에 따라 재결하였고, 민사사건인 경우도 수령의 판결에 이의가 있으면 다시 심의하는 권한이 있었다.

[관련기록]

『조선왕조실록』에는 충주에 내려와 선정을 베푼 충청감사로, 1417년(태종 17)에 서선(徐選), 세종 대에 최순(崔洵), 1471년(성종 2)에 김영유(金永濡), 성종 대에 이덕숭(李德崇), 1466년(세조 12)에 이승소(李承召), 1602년(선조 35)에 우복룡(禹伏龍), 선조 대에 유근(柳根) 등이 기록되어 있다. 유근은 1062년 9월 12일에 충청도관찰사를 배사(拜辭)한 후에 호서 지역 전세 감면을 주청하기도 했다.

[변천]

태종세종 때 감사의 겸목(兼牧) 문제가 대두되면서, 1416년(태종 16)과 1448년(세종 30)에 각각 충청감사가 한때 감영 소재 읍인 충주목사를 겸한 적이 있었으나 곧 환원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감사가 처음으로 순찰사를 겸하였다. 1602년(선조 35) 충주에서 공주로 감영을 옮기고, 감사가 공주목사를 겸하였다.

이때에 겸도순찰사인 유근이 감영의 설치를 위한 절차를 왕에게 보고하여, 이듬해에 겸목사로 승인을 받아 쌍수산성(雙樹山城)을 수축하고, 처음으로 영사(營舍)와 공북(拱北)·진남(鎭南)이란 양문(兩門)을 세우고, 가족을 대동하여 입주하였다. 그러나 1606년(선조 39) 대간이 삼남에 감사가 주재하는 것을 폐지하도록 요구함으로써, 1607년 영사가 폐지되고 감사와 목사가 다시 분리되었다.

그후 현종 대에서 영조 대에 걸쳐 감사 구임(久任) 문제와 겸목 문제가 다시 논의되다가 1725년(영조 5)에 임기 2년 봄에 식구를 거느리고 부임하게 되었으나 1737년 다시 폐단이 있다 하여 폐지되었다. 1794년(정조 18)에 부제학(副提學) 송진명(宋眞明)의 요청으로 충청도 감사의 겸목과 임기 2년 봄에 부임하는 것이 다음해부터 시행되었다. 이와 같이 충청감사는 겸목법과 구임제가 맞물려 변천을 거듭하면서 임기 2년의 겸목제로 정착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주에 충청감사를 두게 되면서 감영 소재 읍으로서 충주는 명실공히 충청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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