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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943
한자 徐選
영어음역 Seo Seon
이칭/별칭 대숙(大叔),언부(彦夫),해화당(海華堂),공도(恭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현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이천시
성별
생년 1367년(공민왕 16년)연표보기
몰년 1433년(세종 15년)연표보기
본관 이천(利川)
대표관직 형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 충청감사를 역임했던 문신.

[가계]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숙(大叔)·언부(彦夫), 호는 해화당(海華堂). 아버지는 밀직사를 지낸 서원(徐遠)이다. 목은 이색(李穡)의 증손으로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이축(李蓄)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아들 서달(徐達)은 황희(黃喜) 정승의 사위이다.

[활동사항]

1367년(공민왕 16) 태어난 서선(徐選)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393년(태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4년 의정부사인을 거쳐 1404년 형조의랑 재직 중 발언이 문제가 되어 여흥(현 경기도 여주)으로 유배되었다. 1405년 유배에서 풀려 사헌부장령으로 복직했으나 계사(啓事)의 잘못으로 다시 태종의 노여움을 사 음죽(현 충청북도 음성군과 경기도 이천시 일부)으로 유배되었다.

1408년 10월 사간원우사간대부로 복직했으나 12월 반란을 꾸미다가 붙잡힌 목인해(睦仁海)의 사형 집행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부평부사로 좌천되었다. 승정원우부대언, 위관(委官), 승정원좌대언을 거쳐 1417년 9월 충청감사로 충청감영이 있는 충주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으나 세곡의 운반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죄로 11월 파직됐다.

1418년(태종 18) 복권되어 경기감사로 부임했고, 1419년(세종 1) 한성부윤·청시부사를 겸했다. 1420년 5월 공사를 구분 못한 처신으로 한성부윤에서 파직되었으나 같은 해 7월 태종의 왕비이자 세종의 모후인 원경왕후가 별세하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었고 9월 경상도감사로 부임했다.

이후 형조참판, 이조참판, 우군총제, 예조참판, 한성부윤을 거쳐서 1427년 3월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1427년 6월 아들 서달(徐達)이 신창의 아전을 죽인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갇혔다가 파직되었다. 1428년 4월 복권되어 개성유후로 부임하고 1429년 판한성부사로 절일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1년 도총제, 1432년 3월 중추원사를 거쳐 1432년 9월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1433(세종 15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태종서선의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던 이유는 관록 부족도 있겠으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정부와 삼사(三司)를 격하시키려는 태종의 정치적 의도가 보다 더 많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415년(태종 15) 승정원우부대언으로 서얼(서자)의 차별을 엄격히 할 것을 주청한 이후로 태종의 총애를 받게 되는데 이는 이복형제를 죽이고 왕권을 차지한 태종의 뜻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선은 서얼 차별을 반대하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 있다. 서선은 이천서씨(공도공파) 중시조로 추앙되는 만큼 묘소는 잘 보존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서선이 죽자 세종서선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게 하고 교서를 내려 “그릇이 크고 쓰임이 넓었으며, 지식이 밝고 행실이 민첩하였다.”고 애도하였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성균관수찬 김맹성(金孟性)의 지은 시장(諡狀)이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2.19 [가계] 오류 수정 이조참의를 지낸 이축(李蓄)의 딸 최씨 사이에서 아들 서달(徐達)을 두었다. 서달은 황희(黃喜) 정승의 사위이다. ->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이축(李蓄)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아들 서달(徐達)은 황희(黃喜) 정승의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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