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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872
한자 權軫
영어음역 Gwon Jin
이칭/별칭 독수와(獨樹窩),문경(文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세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충주목사
성별
생년 1357년(공민왕 6)연표보기
몰년 1435년(세종 17)연표보기
본관 안동
대표관직 이조판서|우의정

[정의]

조선 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독수와(獨樹窩), 시호는 문경(文景). 증조부는 호조참의를 지낸 권혁(權奕)이고, 아버지는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낸 권희정(權希正), 어머니는 김득우(金得雨)의 딸이다. 슬하에 권맹경(權孟慶), 권맹도(權孟度), 권맹정(權孟貞) 3남을 두었다.

[활동사항]

1377년(우왕 3) 2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권세가인 염흥방(廉興邦)의 조카딸과의 혼사를 거절해 염흥방의 미움을 사서 여러 해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 뒤 의창현령이 되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폐단을 시정해 당시 시중이었던 이성계(李成桂)에게 전주판관으로 발탁되었다.

1398년(태조 7) 평안도관찰사 성석린(成石璘)의 경력(經歷, 보좌관)으로 활동했고, 정종 즉위 후 문하부직문하, 지합주사를 지냈다. 1401년 지형조사(知刑曹事),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지냈고, 1406년(태종 6)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해 선정을 폈다. 청렴함이 알려져 1407년 대사헌에 올라 관의 기강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1407년(태종 7) 형조판서에 올라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413년 충주목사로 부임했다. 1417년 이후 형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1422년(세종 4)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로서 정조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23년 판한성부사, 형조판서, 1426년 찬성, 1430년 이조판서에 올랐다.

1431년(세종13) 우의정 재직 중 형률을 잘못 적용해 대간의 탄핵을 받았고, 1433년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 재직 중 사람을 잘못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관직을 그만둔 뒤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목조부터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까지의 사적을 편찬했으며,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제조(提調)가 되어 악률을 만드는 데도 참여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삼성리 산 22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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