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893
한자 金藎國
영어음역 Gim Singuk
이칭/별칭 경진(景進),후추(後瘳)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성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72년(선조 5)연표보기
몰년 1657년(효종 8)연표보기
본관 청풍
대표관직 호조판서|영중추부사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에 은거했던 문신.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경진(景進). 호는 후추(後瘳). 김관(金灌)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급(金汲)이다.

[활동사항]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급제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영남에서 의병 1,000여 명으로 거병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는 전공을 세워 참봉이 되었다. 159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춘추관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전란으로 소실된 일록(日錄)의 보충을 위해 사료의 수집을 청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군기선유관(軍機宣諭官)으로 엄정한 군공(軍功)을 논했으며, 사간원정언을 거쳐 1599년 어사로 관서 지방을 순무했다.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갈라지자 소북의 영수가 되어 대북을 공격하다 파직되어 충주에 은거하였다.

1607년 복직되고 1613년(광해군 5) 임해군(臨海君)의 옥사에 공을 세워 익사공신에 오르고 청릉군에 봉해졌다. 이후 평안도관찰사, 우참찬,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623년 인조 즉위 후 파직되었다가 복권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평안도관찰사 재임 중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해 성을 보수하고 군량 비축 등 전비(戰備)에 힘썼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연좌되어 국문까지 당했으나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조판서로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와 함께 청나라 사신과 화의(和議)를 약정했다. 이후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했다. 1637년 세자시강원이사로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따라서 심양에 갔다가 1640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46년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저술 및 작품]

충주에 은거하는 동안 선현의 언행과 사적을 기록한 『경현록(景賢錄)』을 편찬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금곡리에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