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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918
한자 盧守愼
영어음역 No Susin
이칭/별칭 과회(寡悔),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로인(茹峰老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성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15년(중종 10)연표보기
몰년 1590년(선조 23)연표보기
본관 광주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낙향한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로인(茹峰老人). 우의정을 지낸 노숭(盧嵩)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활인서별제를 지낸 노홍(盧鴻), 부인은 이연경(李延慶)의 딸이다.

[활동사항]

1543년(중종 38)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성균관전적, 홍문관수찬을 거쳐 1544년 시강원사서가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사간원정언으로 대윤(大尹)에 속해 소윤(小尹)의 이기(李芑)를 탄핵 파직시켰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한 후 소윤의 윤원형(尹元衡)이기와 일으킨 을사사화 때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어 충주로 낙향했다. 1547년(명종 2) 순천으로 유배됐다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진도로 옮겨졌다. 당시 진도의 결혼 풍습은 야만적인 쟁탈 행위로 이루어졌는데 이를 예로써 가르쳐 바로잡았다고 한다.

1565년(명종 20) 충청도 괴산으로 옮겨졌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19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홍문관교리로 복직됐다. 이어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을 걸쳐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89년(선조 21) 영중추부사 재직 중 기축옥사 때 과거에 정여립(鄭汝立)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

[학문과 사상]

이연경 문하에서 수학했고 27세 때인 1541년 이언적(李彦迪)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시·문장·서예에 두루 능했으며, 양명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성리학 일색의 풍토에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휴정(休靜)·선수(善修) 등 불가의 승려들과도 교유를 갖는 등 폭넓은 사상의 소유자였다.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이항(李恒) 등과 서신으로 성리학설을 논하였다. 기대승과는 사칠론(四七論)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고, 이항(李恒)과는 주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주자의 인심도심설에 이설을 제기한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과 『시강록(侍講錄)』, 『소재문집(蘇齋文集)』 13권 등이 있고, 『대학장구(大學章句)』,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그 외에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대부분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상훈과 추모]

충주의 팔봉서원,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문간(文簡)이다.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245번지[산막이옛길 315-20]에 노수신 적소(盧守愼 謫所)가 있다. 노수신 적소는 노수신이 1565년부터 1567년 유배 생활을 마칠 때까지 거처한 곳으로 수월정(水月亭)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해 오다가 1952년 괴산댐이 만들어지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기단(基壇)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물림집이다. 대청 1칸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로 띠살문이 달린 1칸짜리 방이 있고 툇간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건물 정면에는 맞배지붕을 올린 1칸짜리 대문이 있고 대문을 기점으로 건물을 따라 기와를 올린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져 있다.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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