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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354
한자 李鍾勳
영어음역 Yi Jonghun
이칭/별칭 정암(正菴)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배항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기도 광주시
성별
생년 1858년연표보기
몰년 1931년연표보기
대표경력 3·1운동 민족대표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부인은 윤치호(尹致昊)의 조카이다.

[활동사항]

이종훈은 25세 때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4년 9월 18일 북접교주 최시형이 각 지역 접주들을 청산에 소집하고 기포할 것을 지시하자 충주에서 기포하였다. 10월 초순에는 농민군을 이끌고 괴산에서 관군과 충청북도 충주시 가흥면에 주둔해 있던 일본 병참군과 접전하였다. 이후 공주 우금치 전투에 가담하였다가 임실로 피신하였다가 최시형을 만나 영동과 보은 북실 전투에 참여한 후 다시 피신하였다. 10월 경 충주 사창리에 진을 치고 있던 선무사 정경원(鄭敬源)에게 “같은 신민으로써 나라 일이 어려운 때를 맞아 서로 해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는 글을 보내 정경원이 10리 밖 성산으로 물러나가 하였다고 한다.

1902년 손병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귀국한 후 동학 개혁을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22년 7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5월 병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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