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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3125
영어의미역 Going North of Jinheung King and Chungj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김현길

[개설]

진흥왕은 재위 12년째를 맞은 551년에 나라를 새롭게 열겠다는 의지로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친다. 개국의 의지를 실천하여 신라의 중흥을 이룩한 진흥왕의 일대 사업은 국경 지대의 요충인 낭성(娘城) 순수에서 우륵의 신가(하림조)를 접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진흥왕우륵(于勒)의 만남에는 어떠한 수수께끼가 있음이 분명하다. 다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와 있는 우륵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과 충주에 전하는 관련 설화를 중심으로 진흥왕의 업적을 엮은 것이다.

[진흥왕의 낭성 순수]

551년(진흥왕 12) 봄, 들의 풀은 파릇파릇 새싹을 돋우고, 나뭇가지에도 신록의 봄기운이 완연한 3월의 햇살은 만물을 생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가야금 가락에 망국의 한을 달래며 긴 겨울을 보내던 우륵은 제자 니문(尼文)과 함께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대문산(大門山) 아래의 한강 변인 금휴포(琴休浦)[우륵이 가야금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고 하는 포구]를 거닐었다.

니문: “참으로 따스한 봄볕입니다.”

우륵: “그러네. 이곳으로 올 때는 왕(진흥왕)의 크나큰 은덕의 힘이었으며, 그 덕택에 그렇게도 추웠던 지난 겨울도 잘 지낸 것 같소.”

니문: “젊으신 왕으로서 넓고 아량이 있는 베풂을 받을 때 가야의 왕에 비할 바가 아니며, 장차 이웃을 아울러 큰 나라를 이룩할 의지에 찬 인품임을 느꼈습니다.”

우륵: “참으로 잘 보셨소. 가야국은 분명 신라에 의해 망할 것이요, 나도 그와 같은 느낌이었소. 신라에는 진취적인 기상이 있음을 바로 젊은 임금님의 품격에서 알아차렸소. 우리는 비록 가야국을 버리고 왔으나, 나는 고국에서 익힌 가야금으로 신라에 보답할 일을 찾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소이다.”

니문: “가야에서는 향토색 짙은 음조를 읊었으니, 이제는 신라의 음조를 새로이 창작하여야 할 것이라 저도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륵: “좋은 생각이요. 나도 이미 이 고장의 음색을 가다듬고자 하였으니 우리가 노력한다면 좋은 신라악(新羅樂)을 형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오.”

우륵은 니문과 망명하여오던 때의 정황을 이야기하면서 또한 장차에 대한 새로운 설계도 아울러 주고받으며 강가의 한 바위에 걸터앉아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응시한다.

우륵: “이 강물은 흘러 백제의 지경을 거쳐 서해로 나가는 데, 참으로 신라로서는 울안에 같인 형국인데?”

니문: “글쎄요, 참으로 신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군요.”

우륵: “하지만 나는 신라의 왕에게서 이 한강을 지배하기 위한 의지가 있음을 느꼈소. 우리를 이곳 국원(國原)의 낭성(娘城)[탄금대]에 보낸 뜻도 우연은 아닐 것이요.”

이때, 파발(擺撥)이 왔다.

파발꾼: “우륵 선생님이십니까. 진흥왕의 하명을 받고 전갈하러 온 사람입니다.”

우륵과 니문은 놀라며, 몸을 바로 갖추고 사신을 맞이하였다.

우륵: “네, 그런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파발꾼: “다름이 아니라, 임금님께서 선생님을 뵈러 오신다고 합니다. 두 분께서 가야금에 능하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연주를 듣고자 하십니다. 임금님이 오시면 연주하실 준비를 하라는 분부입니다.”

우륵: “네에, 충분하지는 못하오나 분부대로 정성껏 준비를 하겠습니다.”

우륵과 니문은 감격하여 다시 몸을 갖추고 신라의 서울 경주를 향하여 큰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진흥왕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새로운 가곡[新歌]을 지어 연주하고자 마음먹고 준비를 하였다.

진흥왕의 낭상 순수는 신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큰 의미를 지닌 행차였다. 그동안 신라는 삼국 중 가장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초기에는 사실상 고구려의 예속 하에 있었다. 신라가 이와 같은 입지에 있었던 것은 지리적인 환경에 기인한 바 컸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서쪽은 백제에, 북쪽은 고구려에 가려 있었기 때문에 대륙의 수준 높은 문물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어떠한 경우에도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야 했으며 또한 대륙으로 통하는 직접 통로를 개척해야만 했다. 이 두 목적은 신라인 모두의 숙원적인 소망이었다.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선용하여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 백제와 더불어 한강 전 유역에서 고구려 세력을 북쪽으로 밀어 올리는데 힘을 합하였다.

551년 백제는 한강의 하류 지역을, 신라는 상류 지역을 각기 담당하여 공략하였으니 백제의 성왕(聖王) 29년이며, 진흥왕 12년의 일이다. 이해 정월에 백제의 성왕은 몸소 백제군과 신라·가야의 지원군을 거느리고 한성(漢城)을 공취하고 나아가 남평양(지금의 서울 지역)을 토벌하여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는 475년에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 병사에게 사로잡혀 아차성(阿且城)[지금의 서울 광장동과 구리시의 경계]에서 살해당하고,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물러난지 76년 만의 일이다. 백제로서는 옛 서울을 비롯한 구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었을까.

신라의 진흥왕은 일곱 살에 즉위하여 어머니[母太后] 김씨의 섭정을 받아오면서 나라의 경영을 골똘히 구상하여 왔다. 그러다가 왕위에 오른 지 12년이 되면서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갖추고, 나라를 새롭게 열겠다는 큰 의지를 다지면서 ‘개국(開國)’이라 연호를 정하고 자주적인 입지를 확립하였다. 진흥왕은 이로부터 자기 소신에 의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현하기 위한 왕성하고도 눈부신 활동을 시작하였다.

진흥왕의 낭성 순수는 단순히 우륵의 가야금 가락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륙으로 통하는 직접 통로인 한강 유역을 확보하겠다는 웅대한 구상을 위한 현지 시찰이었다. 진흥왕이 기대한 바는 한강 상류 지역의 확보에 그치지 않고, 백제가 확보한 하류 지역도 아울러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전 한강 유역을 장중(掌中)에 넣고 이를 통하여 대륙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문호를 얻기 위해 필요한 전략을 세우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우륵의 신가(新歌)]

진흥왕은 3월의 따스한 봄날에 새로이 장악한 한강 변의 요충인 국원의 낭성을 순수하였다. 진흥왕 일행은 낭성에 임시 행궁(行宮)을 설치하였으니 이름하여 하림궁(河臨宮)이라 하고, 이곳으로 우륵을 불러서 연주케 하였다. 진흥왕은 이미 가야에서 망명하여 온 악성 우륵을 국원으로 보내어 여생을 편안히 보내도록 한 바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우륵의 음악을 듣고자 하였던 것이다.

진흥왕 앞에 불려온 우륵과 니문은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새로운 가곡을 지었나이다. 뜻에 어긋나지는 않을런지 염려가 되지만 감히 연주하여 올리겠나이다.” 하고, 진흥왕의 순수(巡守)의 의미를 깨닫고 왕에게 자주적인 의지의 결단을 촉구하는 의미로 진취적인 기상이 담긴 가사에다 곡을 부여하여 새로 지은 가곡으로 연주하였다(二人各製新歌奏之).

진흥왕우륵의 음악을 여유 있는 마음으로 들으면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푸른 물을 굽어보며 신라가 반도의 심장부인 전 한강 유역이 갖는 이(利)를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대륙으로 가는 길이 눈앞에 있으나, 백제가 그 하류를, 상류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우륵의 가야금 곡조는 잔잔하면서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거대한 장애물(백제와 고구려)을 밀어붙이며 흘러가듯 기상이 당당하며, 확고한 신념에 굳건한 의지가 넘치는 음조였다. 진흥왕의 낭성 순수는 신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한 결심을 다지기 위함이었으니 결단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현지 상황을 보기 위해 왔다고 하더라도 운명을 건 사업을 결심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진흥왕우륵의 음악을 듣고는 깊이 감동되어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되었으리라.

우륵의 가야금 연주가 끝나자 진흥왕은 “참으로 나의 고뇌를 시원하게 풀어주는 아주 훌륭한 연주로구나, 어찌 그대는 나의 마음을 그와 같이도 뚫어 보느냐, 장하도다 장한 곡조로다.” 하고 감탄하였다. 이 순간 진흥왕은 굳은 결심을 다지게 되었으니, 신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 일차적인 사업은 한강 상류 지역에서 고구려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 명령의 시달이었다.

우륵의 음악을 들은 뒤 진흥왕거칠부(居柒夫)를 비롯하여 대각간(大角干) 구진(仇珍), 각간 비태(比台), 잡찬(迊湌) 탐지(耽知)·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8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 지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공취케하였다. 신라는 이 작전에서 적성(赤城)[지금의 단양]을 확보한 뒤, 이 지역민을 선무하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국보 제198호]를 세웠다.

우륵의 신가는 진흥왕의 포부를 한층 불태우는데 충분하였다고 하겠다. 진흥왕은 뜻한 바 의지를 주저 없이 실천해 나갔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수년 내에 전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이에 대한 관리를 오차 없이 수행하여 목적한 바를 성취하였다. 진흥왕은 단양 이북의 한강 상류 지역을 확보한 후에는 우륵의 음악에 대한 배려를 하였다. 우륵이 낭성에서 연주한 새로운 가곡의 이름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으나 이 신가와 진흥왕의 의지는 상합(相合)되어 신라의 운명을 결정짓게 한 것이니 우륵의 신가에 매우 관심이 있던 진흥왕은 이에 깊은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진흥왕우륵의 음악을 우륵에게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이듬해인 552년(진흥왕 13)에 대나마(大奈麻) 법지(法知)[또는 注知계고(階古)와 대사(大舍) 만덕(萬德) 등 세 사람을 우륵에게 보내어 가야의 음악을 전수받아 영원히 전승토록 하였다. 이에 우륵은 이들의 재능을 고려하여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쳐 주었다.

세 사람은 우륵에게서 11곡을 전해 받고서는 말하기를, “이것은 번다하고 음란하니 우아하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고는 그것을 요약하여 5곡을 만들었다. 우륵이 이를 듣고 처음에는 노하다가 다섯 가지의 음조를 다 듣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正)고 할 만하다. 너희들이 왕의 앞에 나아가서 연주를 하라.”고 하며 진흥왕 앞에 나아가서 연주하게 하였다. 우륵은 자기의 가르침에 그치지 않고 제자들의 창의적인 발전에 오히려 보람을 느꼈을 것이며, 이는 음악의 다양한 이해를 발전된 모습으로 보고자 하는 스승다운 새로운 면이라고 할 것이다.

진흥왕이 그들의 연주를 다 듣고 나더니, “전날에 낭성에서 듣던 소리(음악)와 다를 바가 없구나.” 하며, 우륵의 음악을 완전히 전수받았음을 인정하고, 즐거워하면서 크게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리었다. 그런 연후에 가야금을 신라의 음악으로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부 간신들이 의논하여 진흥왕에게 “멸망한 가야국의 음율은 취할 바가 못 됩니다.”고 반대의 의사를 표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가야의 왕이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대개 성인(聖人)이 음악을 제정하는 것은 인정(人情)으로 연유하여 조절(調節)하게 한 것이니, 나라의 다스리고 어지러움은 음악의 곡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강한 의지로 신라악으로 시행케 하여 대악(大樂)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가야금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도 진흥왕의 굳은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가야금에는 두 음조가 있는데, 하나는 하림조(河臨調)요 다른 하나는 눈죽조(嫩竹調)이다. 모두 180곡이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림조는 우륵진흥왕의 부름으로 하림궁에 나아가서 새로운 가곡을 연주한 사실과 연관지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륵의 신가는 어떠한 것일까? 『삼국사기』악지(樂志)에 보이는 가야에서 작곡한 12곡명이 모두 향악(鄕樂)임을 생각할 때, 새로운 환경과 관련한 향토악일 것으로 생각되니 ‘낭성’과 관련한 가곡이 아닌가 한다. 이 새로운 음조가 진흥왕의 마음을 움직이고 나아가 신라악을 형성하게 된 바탕이 되었으니 하림궁에서 첫 연주를 한 의미로 이름하여 하림조라 하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하림조는 우륵이 국원에서의 생활 이후 이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향악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다가 진흥왕의 낭성 순수를 대비한 즉,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어 진흥왕의 의지를 실현케 한 신가의 음조라고 할 것이다. 이 새로운 음조와 우륵에게서 전수받은 계고 등 세 사람의 비판적(신라적)인 음조가 조화를 이룬 것이 하림조의 근간을 이루어 신라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눈죽조는 어느 지방의 음조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이 혹 가야 지방을 중심으로 한 초기의 음조가 아닐까. 하림조는 신라악으로 계승되어 내려오다가 조선 초기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정착되어 오늘에 그 일부 음조를 짐작할 수 있어 다행이라 하겠다. 우륵의 음악, 즉 신라악의 바탕인 하림조는 낭성에서 우륵이 새로이 개발한 가곡으로 이 지역의 특성이 담겨 있는 향악임이 분명하다.

[한강 유역과 국원소경(國原小京)]

진흥왕우륵의 음악에 고무되어 세 번째 사업을 추진하였으니, 곧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 유역의 확보를 위한 대작전이었다. 다음에는 전 한강 유역의 확보에 따른 관리를 위한 사업을 순차적으로 실현하고 있으니 이를 시대 순에 따라 정리하고자 한다.

1. 551년(진흥왕 12): 1월에 개국(開國)이라 연호를 고치었다. 백제는 신라·가야의 지원을 받아 한성 등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하류의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3월에 진흥왕은 낭성에 순수하여 우륵을 하림궁으로 불러 가야금을 연주케 하니, 우륵은 새로운 가곡[新歌]으로 연주하였다. 진흥왕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죽령 이북의 10개 군을 쳐서 빼앗고 단양에 신라적성비를 세웠다. 이는 전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 세력을 완전히 북쪽으로 밀어 올리기 위한 것으로 일차 목적을 성취한 것이라고 하겠다.

2. 552년(진흥왕 13): 진흥왕계고(階古)·법지(法知)[또는 注知만덕(萬德) 등 세 사람을 우륵에게 보내어 우륵의 음악을 전수케 하였다. 학업을 마치고 진흥왕의 앞에서 연주하니 진흥왕은 “전날 낭성에서 듣던 음과 다를 바가 없다.”고 칭찬하며 후히 상을 주고,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면서 신라악으로 정립하여 대악으로 발전시켜 오늘에까지 전하게 되었다.

3. 553년(진흥왕 14): 7월에 백제가 취한 한강 하류 유역을 공취한 후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金武力)을 군주로 삼아 관리케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의 전 유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4. 554년(진흥왕 15): 7월에 백제의 성왕이 신라의 배신에 대한 보복으로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옥천]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5. 555년(진흥왕 16): 10월에 진흥왕은 북한산을 순행하여 북한산 순수비를 세우고 척정봉강(拓定封疆)하였다. 이는 사실 백제에게서 빼앗은 한강 하류 유역에 대한 현지 시찰이라고 할 것이다.

6. 557년(진흥왕 18): 국원을 소경(小京)으로 승격시키고,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다. 이 사업은 북한산 순행 결과에 대한 조처로 백제를 의식하였던 한강 남쪽보다 장차 한강 이북의 고구려를 의식한 대응책이라고 할 것이다.

7. 558년(진흥왕 19): 국원이 실질적인 소경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중앙의 귀척(貴戚) 자제와 6부의 호민(豪民)을 국원으로 이사시켰다. 이는 전 한강 유역의 관리를 위하여 그 중심부에 있는 충주를 중요시한 것이다. 충주는 신라의 경주에서는 실질적인 대륙으로 통하는 문호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통일을 위한 전진기지화를 도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제반 조치는 진흥왕이 낭성과 북한산 순수에서 얻은 새로운 결단적 조치라고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차적이며 지속적으로 수행된 일련의 사건 전개는 신라가 전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관리를 위한 일련의 조치로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의한 일인 것이었다. 숨 돌릴 사이 없이 지속된 치밀한 사건의 전개는 분명 낭성에서 우륵의 신가를 들으면서 본래의 계획된 심증을 더욱 굳히고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추진된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자주의식과 문화 창달의 성군]

낭성의 봄은 가고 만물은 왕성한 성장기를 맞이하여 온 산야는 검푸르게 변하여 가고 있었다. 진흥왕도 자연의 변화에 힘입은 듯 신라의 운명을 변화시키고자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니, 대외적으로 자주의식을 뚜렷이 하여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관리에도 만전을 기하고자, 565년(진흥왕 26) 8월에 아찬 춘부(春賦)를 국원의 장관으로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국기를 안정적으로 이룩한 뒤 568년(진흥왕 29)에는 크나큰 번영을 전제로 한 대창(大昌)으로, 572년(진흥왕 33)에는 홍제(鴻濟)라고 연호를 바꾸어 가면서 자주의식을 더욱 일깨우고 있어 진흥왕의 자주독립적인 사상을 알게 한다. 사실상 신라는 한강 유역의 넓은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인적, 물적 자원의 이익도 컸으나, 대륙으로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얻어 신라의 숙원을 달성하였다는데에 보다 큰 의미가 있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의 중간 부분을 벌려 놓게 함으로써 신라가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으니, 곧 삼국 통일의 제반 입지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확보한 이후 555년(진흥왕 16)에 비사벌(比斯伐)[지금의 창녕]에 진출하여 주(州)를 설치하고 561년(진흥왕 22)에 불사국(不斯國)[比斯伐]에 순행하여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 국보 제33호)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공략하여 복속시키는 등 낙동강의 전 유역을 영유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화랑 사다함(斯多含)은 유명하다. 564년(진흥왕 25)부터는 매년 독자적으로 중국 남조의 진(陳)과 북조의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를 공고히 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뚜렷이 하였다. 이것이 신라의 자주적인 외교의 시작이기도 하다.

실로 진흥왕우륵의 가야금과의 만남은 우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 확장을 위한 영주(英主)로만 그동안 알려져 왔으나, 가야금을 오늘에 전승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외에 다음과 같이 문화와 사상 등에서도 우리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남기고 있다.

첫째, 545년(진흥왕 6)에 이사부(異斯夫)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居柒夫)에 명하여 『국사(國史)』를 편찬한 사실이다. 『국사』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고대 국가에 있어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로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것이다.

둘째, 전왕 법흥왕 때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육성·발전시킨 사실이다. 544년(진흥왕 5)에 흥륜사(興輪寺)를 준공하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봉불(奉佛)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553년(진흥왕 14)에는 월성(月城)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황룡(黃龍)이 나타나자 이를 고쳐서 불사(佛寺)로 하고 황룡사라 하여 566년(진흥왕 27)에 완공하였으니 신라 최대의 사찰이다. 574년(진흥왕 35)에는 황룡사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육상(丈六像)을 주조하여 모셨다. 같은 해 기원사(衹園寺)·실제사(實際寺)도 준공하였다.

549년(진흥왕 10)에는 양(梁)에서 승려 각덕(覺德)이 불사리를 가져오자 흥륜사 앞에서 맞이하였으며, 565년(진흥왕 26)에는 승려 명관(明觀)이 불경 1,700권을 진나라에서, 576년(진흥왕 37)에는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수(隋)나라에서 불경과 불사리를 가져와 교리적인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572년(진흥왕 33) 10월에는 영토 전쟁에서 전사한 병졸들을 위하여 외사(外寺)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7일 동안 열었다. 신라 불교가 호국 불교임을 입증하는 시원적 행사라고 하겠다.

진흥왕은 자신이 말년에 머리를 깎고 승의(僧衣)를 입고 법운(法雲)이라 법호하여 여생을 마쳤으며, 왕비도 이를 본받아 중이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거처하다가 죽었다. 진흥왕의 불교에 대한 배려는 곧 신라 불교의 시원을 이루는 업적인 동시에 호국 불교로서 알려진 한국 불교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이해된다.

끝으로 빠뜨릴 수 없는 업적은 화랑도(花郞徒)의 창설이다. 576년(진흥왕 37)에 여성 중심의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하였다고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562년(진흥왕 23)에 화랑 사다함이 가야를 정벌할 때 공을 세운 사실로 보아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는 조직되었으리라고 본다. 삼국 통일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화랑도는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기개를 북돋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화랑도의 역할은 진흥왕의 영토 확보에도 기여하였다. 이는 오늘날 전하는 진흥왕순수비가 말하여 주고 있다. 또한 단양의 신라적성비와 북한산 순수비를 비롯하여, 561년(진흥왕 22)에는 경상남도 창녕에 창녕비를 세우고, 568년(진흥왕 29)에는 북쪽으로 함경남도까지 진출하여 함흥에 황초령비(黃草嶺碑)와 이원(利原)에 마운령비(磨雲嶺碑)를 세웠음에서도 짐작된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일으켜 대외적으로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는 등 영토 확장으로 통일의 꿈을 실현코자 국가 의식을 고취하고, 대내적으로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연호를 개국 등 세 차례나 고치면서 신라의 중흥을 다졌다. 또한 국사를 편찬하고 신라악을 형성하였으며, 호국의 의지를 국민과 함께 다지고자 불교의 흥륭(興隆)을 꾀하는 등 우리 역사상 문화를 이해하고 보호·전승시켜 오늘의 민족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대표적인 성군(聖君)이라 할 것이다. 진흥왕이 성군이 된 데에는 진흥왕의 탁월하고 치밀한 국가 경영 계획도 있었지만 낭성에서 우륵의 음악과 접하면서 개국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 정력적인 추진력으로 자주적인 국가를 이룩하고자 온 정열을 기울였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낭성의 봄이 지난 뒤 우륵이 하림궁에서 가야금을 탄주한 곳이라 하여 이곳을 탄금대(彈琴臺)라 부르게 되었다. 우륵탄금대 주변을 찾아다니면서 가야금을 연주하였으리라고 본다. 탄금대 주변에 우륵과 관련된 지명도 있으니, 금대리(琴臺里) 또는 금곡리(琴谷里)[지금의 칠금동], 금뇌리(琴腦里)[지금의 금릉동], 청금리(廳琴里)[지금의 청금정(廳琴亭)의 별칭] 등이 그것이다. 충주의 명소인 사휴정(四休亭)도 있으니, 중앙탑면의 누암(樓岩)이 일휴정(一休亭)이요, 금가면의 옥강정(玉江亭)이 이휴정(二休亭)이요, 하소(河沼)가 삼휴정(三休亭)이며, 엄정면목계(牧溪)에 사휴정(四休亭)이 있으니 이는 모두 산을 등지고 강에 임하고 있는 절경이다. 속전(俗傳)에 악사 우륵이 이곳에서 쉬어 머물던 곳이라고 하여 사휴정이라고 한다.

이외에 우륵의 가야금 곡(曲)에 상가라도(上加羅都)·하가라도(下加羅都) 등 지명과 관련된 곡명이 있는데 실제 충주목 관할에 있던 상가라제(上加羅堤)·하가라제(下加羅)·가라곡제(加羅谷堤)·상가라곡제(上加羅谷堤)·하가라곡제(下加羅谷堤) 등의 제언(堤堰) 이름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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