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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의 10월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456
한자 達城- 十月 事件
이칭/별칭 달성군 10월 항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10월 2일연표보기 - 달성의 10월 사건 본격적으로 개시
종결 시기/일시 1946년 10월연표보기 - 달성의 10월 사건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46년 10월 1일 - 대구역 총파업 시위 중 대팔 연탄 노조원 황 아무개 경찰에 의해 사살
전개 시기/일시 1946년 10월 3일 - 달성군 화원면에서 좌우익 충돌
전개 시기/일시 1946년 10월 4일 - 대구에서 경찰 병력 출동
전개 시기/일시 1946년 10월 6일 - 군중들이 파출소를 공격함

[정의]

1946년 10월 달성군에서 발생한 노동자·시민의 파업 사건.

[역사적 배경]

1946년 9월 대구·달성 지역에서 식량 문제가 폭발 일로에 있을 때, 대구에도 총파업이 파급되었다. 당시 대구의 5개 신문사가 9월 25일부터 10월 3일까지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였으며, 9월 24일 전국 노동 조합 평의회[전평] 경상북도 위원회의 파업 지시에 따라 9월 30일부터 모든 공장들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달성에서의 항쟁은 9월 총파업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중적 불만으로 인해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총파업이 항쟁을 재촉한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9월 30일부터 전평 경상북도 위원회[이하 도평] 사무실[현 대구 시민 회관 주변] 앞에 노동자 및 시민들이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 10월 1일 저녁 대팔 연탄 노조원 황말용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10월 사건의 서막이었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 시민, 학생들이 10월 2일 아침부터 공회당[현 대구 시민 회관]과 도평 사이의 도로에 집결하였고, 특경 대원과 대치 중 경찰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하였다. 한편,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된 군중은 대구 경찰서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미군 장갑차가 나타나 군중들을 해산시켰고, 계엄령 및 통금령이 내려졌다. 미군정의 강력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항쟁은 3일과 4일에도 계속되었다. 민중들은 미군정의 경찰과 관료를 주된 공격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이 사건은 대구와 인접한 달성을 거쳐 경상북도 각 농촌 지역에 파급되었고, 그 가운데 농민들의 폭력화가 이루어지면서 봉기 형태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과]

달성의 10월 사건은 1946년 10월 2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0월 2일 달성군 유가면[현 유가읍]구지면에서 군중이 경찰과 경찰의 집을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틀 뒤 대구에서 경찰 30명이 출동하자 군중들은 소총을 반환하였으며, 경찰이 군중 5명을 체포하고, 죄수 7명을 잡았다. 10월 3일 9시 달성군 화원면에서 좌우익이 충돌하고 교회가 피습을 당했다. 같은 날 오후 6시 40분 무렵 월배면에서 경찰 4명 중 2명이 도주하여 대구로 갔고, 달성군 화원면에서는 군중이 화원 경찰서를 습격하자 순찰대가 파견되었다. 저녁 8시 50분 무렵 도 경찰이 성서, 다사, 하빈을 접수하기 위해 출동했으며, 사망 경찰 4명과 민간인 사망자 1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대구로 돌아왔다.

10월 4일 현풍에서는 군중이 장악하고 있던 경찰서를 대구에서 출동한 경찰 병력이 되찾았다. 이때 현풍 군중은 500~2,500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다. 10월 5일 달성과 선산에 출동한 도 경찰은 경찰과 형사 시신 6구를 수습하여 대구로 돌아왔다. 10월 6일 월배면에서는 파출소가 부서지고 전화선이 절단되었으며, 벽에는 '조선 민족은 군정은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같은 날 옥포에서는 군중들이 파출소를 파괴하고 소총과 실탄을 가지고 떠났으며, 논공에서는 군중 100명이 파출소를 공격하고 경찰 2명이 군중에 잡혔다. 출동한 경찰이 쏜 총에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다.

[결과]

1946년 10월 12일 현재 달성 경찰서의 피해 상황을 보면, 사망 경찰관 6명, 중상 경찰관 17명, 경찰 직원 사택 파괴 107호, 총 피해액 1,500만원으로 집계되었다. 또 1946년 10월 20일 10·1 사건 대책 위원회 발표의 피해를 보면, 대구와 함께 통계를 내고 있는데 사망자 27명 중 관리 14명, 일반인 13명, 부상자 61명 중 관리 40명, 일반인 21명, 건물 파괴 156건 중 관청 32건, 일반 124건으로 집계되었다. 대구·달성의 피해는 경상북도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나타낼 정도로 치열하였다.

[의의와 평가]

달성의 10월 사건은 치열하게 전개된 항쟁 양상과 피해 규모에서 알 수 있듯 지역적 차원의 정치·경제·사회 문제가 폭발한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광복 시국에서 전국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문제, 곧 광복과 함께 변화되어야 할 일제하의 정치·경제·사회 구조가 미군정에 의해 유지 혹은 재생산되는 것에 대한 항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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