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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479
한자 高麟玉
영어공식명칭 Ko In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1년 3월 14일연표보기 - 고인옥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고인옥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백의단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고인옥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윤독회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1년 9월 - 고인옥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42년 2월 8일 - 고인옥 대전지방법원에서 면소 처분을 받고 석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2년 - 고인옥 대통령표창 수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 - 고인옥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몰년 시기/일시 2005년 1월 30일연표보기 - 고인옥 사망
출생지 창평리 -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창평리
거주|이주지 봉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58-6]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백의단 회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고인옥(高麟玉)[1921~2005]은 1921년 3월 1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창평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조직인 백의단(白衣團)과 윤독회(輪讀會)에서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1939년 경부선 왜관철교~약목 구간에서 근로보국 활동을 하던 대구사범학교 일본인 재학생과 한국인 재학생 간에 민족 차별로 인하여 싸움이 일어났다. 학교 당국이 일본인 학생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자 조선인 학생들이 반발하여 평소 악명 높던 교사 세 명을 집단 구타하였다. 이때의 이른바 ‘왜관 사건’으로 조선인 학생 18명이 퇴학 또는 정학 처분을 당하였다.

1939년 8월 학교근로보국대 후기로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 권쾌복(權快福)·배학보(裵鶴甫)·조강제(趙崗濟)·최영백(崔榮百)·문덕길(文德吉)·김성권(金聖權)·최태석(崔泰碩) 등 20여 명은 왜관심상소학교 앞 낙동강 백사장에서 왜관 사건의 진상과 왜관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학생들은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 행동 통일을 도모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비밀결사 단체인 백의단을 조직하였다. 고인옥도 이 무렵 백의단에 가입하였다.

한편,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윤독회를 조직하고 독서토론 활동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1월 고인옥을 비롯한 박효준(朴孝濬)·강두안(姜斗安)·이태길(李泰吉)·문홍의(文洪義)·유흥수(柳興洙) 등 윤독회 회원들은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문예 작품집 『반딧불』을 약 200부 간행하였다. 윤독회는 1940년 11월 23일 문예부로 개편되었다.

1941년 7월 말 대구사범학교 8기생으로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鄭鉉)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높이는 교육을 한 사실이 일제 경찰에 의하여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정현의 집을 수색하다가 『반딧불』을 압수하였다. 그 결과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단·윤독회·문예부·연구회·다혁당에서 활동한 교직원·학생·동문·학부형 등 3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고인옥도 1941년 9월 체포되었으며, 구금되어 옥고를 치른 지 1년 5개월이 지난 1942년 2월 8일 대전지방법원에서 면소 처분을 받고 출소하였다. 고인옥은 2005년 1월 30일 사망하였다.

[묘소]

고인옥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58-6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옥의 공적을 기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1998년 3월 1일에는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대구사범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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