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조차 희미해진 한강가 나루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02
한자 記憶-漢江-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창우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한강가에 있던 나루터 이야기.

[개설]

한강은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을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다. 한강의 이름은 본래 우리말의 큰 물줄기를 뜻하는 ‘한가람’에서 유래되었다. ‘한’은 크다·넓다·가득하다의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옛 이름이다. 그러므로 한강은 크고 넓으며 가득한 물이 흘러가는 강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한강은 교통로적 기능, 군사적 기능, 경제적 기능, 문화적 기능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다양한 기능 중 가장 큰 것이 교통로로서의 기능이었다. 한강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통행하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하여 건널 수밖에 없었다.

강을 건너는 방법 중 가장 편리한 방법은 다리를 건설하여 건너는 것이었지만 옛날의 기술로는 한강의 본류와 같이 큰 강에 다리를 놓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당시 한강을 건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배를 이용하여 한강을 건너는 방법이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물살이 약하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용이한 지점에 배를 대고 출발시킬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장소가 바로 나루였다.

나루는 강을 건너기 위한 장소로서 배가 정박하는 곳을 말하는데, 나루는 강폭의 크고 작음에 따라 여러 용어로 사용되었다. 나루는 한자로 표현할 때는 도(渡)·진(津)이라 표현하고 좀 더 큰 것은 포(浦), 바다에 위치한 대규모의 나루는 항(港)이라고 하였다.

그중에서 중요한 강이나 바닷목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군대가 주둔하면서 지키는 나루를 진(鎭)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특히 큰 강 하구나 바다 항구에는 포(浦)를 많이 사용하였다. 한강에 위치한 나루는 도(渡)와 진(津)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 시대에 제도적으로 정착된 도진(渡津)은 조선 시대에는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을 감시하고 현황을 파악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나루터는 많은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장소이고 강을 건너기 위해 거쳐야 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이곳을 관리하는 별감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1703년(숙종 29)에 오진(五津)에 별장(別將)을 두었다고 하였는데, 오진이란 한강나루[漢江渡]·노들나루[露梁津]·양화나루[楊花渡]·삼밭나루[三田渡]·광나루[廣津]를 말한다. 나라에서 이곳에 나루터를 설치한 것은 단지 사람들의 왕래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정세가 위급한 때를 대비하는 뜻도 있었다.

관선이 배치된 나루에서는 강을 건너는 데 뱃삯은 없었다. 나루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만큼 범죄자와 유랑민들을 기찰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나루터에는 자연적으로 통행 인파가 몰리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는 나루터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기도 하였으며, 마포나루, 송파나루 등지에 상인들이 모여 주막과 생필품을 파는 작은 상업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나루의 운영 자금은 정부로부터 땅을 받아 거기에 생산되는 소출을 통해 마련되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나루를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의 3등급으로 나누었다. 나루의 등급에 따라 근무하는 뱃사공과 나루에 소속되어 있는 배의 크기와 수량도 차이를 두었다.

규모가 큰 나루에는 10~15명의 뱃사공 및 15척의 배, 중로에는 3명 내외의 뱃사공이 있었다. 국가에서는 주로 대로의 나루를 집중적으로 관리하였으며, 중로 이하의 나루에는 관리책임자를 파견하지 않았다. 대로인 양화도, 삼전도 등은 10결(結)의 진척위전을 지급받았으며, 교통이 빈번한 한강도에는 20결의 진척위전을 지급받았다.

뱃사공[津夫] 또한 규모에 맞춰 10~20명 정도의 인원이 배속되었다. 다음으로 중로인 광진의 경우는 3결의 진척위전과 3명 내외의 뱃사공이 배속되었다. 나머지 소로에 해당하는 진에는 1결의 진척위전과 1명의 뱃사공이 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각 나루는 일정 수의 나룻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진 한강가 나루터는 도로명 이름, 유적지, 표석 등으로 남아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한강의 나루]

서울특별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한강에는 조선 시대에 공암나루, 양화나루, 서강나루, 마포나루, 용산나루, 노들나루, 흑석나루, 동작나루, 서빙고나루, 두모포, 입석포, 뚝섬나루, 신천나루, 삼밭나루, 송파나루, 광나루 등이 있었으며, 동작구에는 노들나루, 흑석나루, 동작나루가 있었다.

1. 광나루[廣津]

광나루는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광나루는 서울에서 광주(廣州)로 통하는 요지일 뿐 아니라 강원도 강릉으로 가기 위한 시발점이었기 때문에 광나루는 강원도와 남쪽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이다.

태종 때 별감을 두어 한강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기찰(譏察)하고, 한강의 조운을 관장하였으며, 진선 4척을 두었다. 현재는 광진교와 천호대교가 건설되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주므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하였다.

2. 삼밭나루[三田渡]

삼밭나루는 조선 전기에 주로 이용하였던 나루터이다. 삼밭나루는 조선 시대 세종한강 건너 대모산 기슭에 있는 헌릉을 참배하러 가는 길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기도 여주의 영릉과 서울특별시 강남구의 선릉을 참배하기 위해 임금이 종종 이용하던 나루이다. 조선 후기에는 삼밭나루를 지나 광주로 가는 길목에 병자호란 후 세운 삼전도비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삼밭나루보다는 바로 옆에 새롭게 조성된 송파나루를 주로 이용하였다.

3. 송파나루[松坡津]

송파나루는 석촌호수 부근에 위치했던 나루로서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나루는 아니다. 조선 후기 병자호란 이후부터 삼밭나루 대신에 많은 사람들이 송파나루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송파나루는 삼밭나루를 대신하면서 광주·이천으로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송파나루는 서울 외곽을 지키는 역할을 가져 별장이 다스렸다.

별장은 송파나루 외에도 삼전도·동잠실(東蠶室)·광진 등의 나루터를 함께 관할하였다. 송파나루에는 9척의 진선이 있어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송파나루는 1960년대까지 뚝섬과 송파를 연결하는 배가 운항되어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 강남지역의 개발로 교량이 건설되면서 나루터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4. 뚝섬나루[纛島津]

뚝섬나루는 영동대교가 지나가는 뚝섬선착장 부근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과거 경상도·강원도의 세곡 운송을 위하여 선착장을 두고 한강을 오가는 세곡선을 관리하던 곳이다. 조선 효종 때 강원도에서 오는 목재·땔감이 거래되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뚝섬나루에 세금을 거두는 수세소(收稅所)를 설치하였다. 뚝섬나루는 남한강 유역과 북한강 유역의 물화가 모이는 곳이었다.

5. 한강진나루[漢江鎭津]

조선 시대 제1의 도선장(渡船場)으로 한강도(漢江渡)라고도 불렸다. 서울에서 용산·충주로 통하는 큰 길의 요충지였다. 조선 후기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어서 진(鎭)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6. 마포나루[麻浦津]

마포나루는 용산강이 합류하는 한강 북안에 있었으며 삼개나루라고도 불렸다. 삼남지방에서 오는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던 지역으로서 일찍부터 어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마포는 지리적으로 조운상 수상교통의 요충지로서 포구문화가 일찍부터 번성하였다. 그러나 철도의 부설과 6·25전쟁 후 강화만(江華灣)이 막혀 한강으로 배들의 출입이 불가능해지면서 마포나루의 기능이 점차 줄어들었다.

7. 양화나루[楊花津]

양화나루는 마포구 합정동에 있었던 나루터이며, 양화도(楊花渡)라고도 불렸다. 양화나루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에서 올라오는 곡물을 서강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 항구로서 농산물의 재분배를 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 영조 이후에는 송파진·한강진과 함께 한강의 삼대 관방으로 요충지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여 어영청(御營廳)에서 관할하였으며 10척의 배가 양화나루에 속해 있었다.

8. 공암나루[孔岩津]

공암나루는 강서구 가양동에 있었던 나루터로 북포(北浦)라고도 불렸다. 공암나루는 강화도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였으며, 나루의 크기가 작아 양화나루 아래 예속되어 있었다. 진선 5척이 있었으나 나중에 관선은 폐지되고 사도선(私渡船)이 통행료를 받고 사람들을 통행시켰다.

[동작구의 나루]

동작구는 일찍이 서울의 관문인 노들나루가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 외에도 흑석나루, 동작나루 등이 있었다.

1. 노들나루[鷺梁津]

노들나루는 동작구 노들나루공원 일대에 있었던 나루터이며 노량진(露梁津), 노도진(露渡津), 노량도(鷺梁渡), 노량진도(鷺梁津渡), 노량나루로도 불렸다. 노들나루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나루터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하여 충청도·전라도로 향하는 중요한 통행로였다.

서울로 통하는 나루터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서울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기찰(譏察)하기 위해 군대가 유진(留陣)하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노들나루에 속한 진선(津船)은 10척이었고, 관선(官船)은 15척이었다.

노들나루에서는 처음에는 개인소유의 나룻배가 있어 도선료를 받고 행인들을 수송하였지만, 1414년(태종 14)에 한강 상류의 광나루와 함께 별감이 배치되어 관에서 관리하면서 도선료를 받지 않았다. 연산군 때는 이곳의 나루만을 통행하도록 하고 나머지 한강의 모든 나루를 봉쇄하기도 하였다.

노들나루는 조선 초기에는 주로 민간인들이 이용하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국왕의 행차에 빈번히 이용되었다. 특히 정조는 선릉(宣陵)·정릉(靖陵)·장릉(章陵)·현륭원(顯隆園)의 능행길과 온양온천을 이용할 때 노들나루가 통로에 위치하여 자주 이용하였다. 때문에 노들나루에도 한강나루, 삼전도에서와 같이 배다리인 주교(舟橋)를 설치하였다.

정조는 국왕이나 국장(國葬) 행렬이 안전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전담 관청인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고 1793년(정조 17)에 「주교사절목(舟橋司節目)」을 제정하였다. 또한 노들나루 일대의 강변은 절경을 이루었는데, 여러 명사, 문인들이 강변을 따라 누정(樓亭)을 짓고 강상풍월(江上風月)을 사랑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노들나루는 서울과 과천 땅의 경계가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서울 출입의 감회를 읊으며 석별(惜別)의 술잔을 나누기도 하였다. 1900년 한강 최초의 다리인 한강철교노들나루에 건설되면서 노들나루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2. 흑석나루[黑石津]

흑석나루동작구 흑석동 강변[현 흑석체육센터 부근]에 있었던 나루터이며 흑석진(黑石津) 또는 검은돌나루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흑석나루은 조선 초기에 주로 이용되었는데, 1395년(태조 4) 세곡 운송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용산~충주 사이에 7개소의 수참(水站)을 설치하면서, 흑석나루에도 수참을 설치하여 참선(站船)의 정박소로 이용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흑석진에 참선 15척이 비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도성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하기 위해서는 노들나루와 한강나루를 이용해야 하지만 민간인들은 통행량이 많고 기찰이 심한 두 개의 나루 대신 사선(私船)으로 운행되는 흑석나루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흑석나루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인근에 동작나루가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고, 이후 한강대교가 건설되면서 나루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3. 동작나루[銅雀津]

동작나루는 동작구 동작역 일대에 있었던 나루터이며 동작진(銅雀津), 동작도(銅雀渡) 또는 동재기나루라고도 불렸다. 동작나루노들나루의 관할 아래에 있었는데 과천, 수원 등지에서 남태령을 지나 도성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철저한 나루의 관리를 위해 별장이 파견되었으며, 1746년(영조 22)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동작나루로 이관하면서 나루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철종은 1857년(철종 8)에 배다리인 주교를 설치하여 인릉(仁陵)을 찾기도 하였다.

한강의 여러 다리들이 건설되면서 동작나루는 기능을 상실하였고, 동작나루가 있던 자리에 동작대교가 설치되어 한강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현재 동작역 4번 출구 앞 보도에 ‘동재기나루터’ 표석이 있다.

[참고문헌]
  • 『한강사』 (서울특별시, 1985)
  • 『동작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1994)
  •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1)
  •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 동작구청(https://www.dongjak.go.kr)
  • 문화마케팅연구소(http://www.traveli.co.kr)
  • 문화콘텐츠닷컴(http://www.culturecontent.com)
  • 서울특별시 한강사업본부(https://hangang.seoul.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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