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1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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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黨活動 |
영어의미역 | Political Party Activitie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연화준 |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이루어지는 각 정당들의 정치 활동.
[개설]
일반적으로 정당은 동일한 정견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권력의 획득·유지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견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조직한 정치적 단체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정당은 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이기 때문에 사회·경제·학술·종교 등 여타의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와는 구별된다. 한국의 정당법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정당은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고 공직 선거에 후보자를 추천 또는 지지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의 자발적 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정당활동은 일반적으로 선거라는 정치 활동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당의 설립 목적이 정권 획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선거 활동은 정당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활동의 핵심이며 선거 결과는 당의 존립 자체를 결정짓는 중심 요소인 것이다. 충청북도 음성군에서의 정당 활동도 주로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하여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당 활동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선거 기간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다 이후에는 미미해지는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1공화국 시기]
제1공화국 시기에는 주로 민족 해방을 위해 독립 운동을 했던 많은 단체들과 해방 후 조직된 각종 정치 단체들을 중심으로 많은 정당들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1948년 제헌국회 개원 당시 16개, 1950년 제2대 국회 11개, 1954년 제3대 국회 4개, 1958년 제4대 국회 3개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건국 초기에는 많은 정당 및 정치 단체들이 난립하였으나 점차 통합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 시기의 주요 정당으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과 야당으로서 자유당과 경쟁한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세력으로 대별할 수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의 경우도 당시의 정당 활동은 4번의 선거에서 3번의 당선자를 배출할 정도로 주로 자유당과 민주당의 대결 구도를 중심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제헌의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의 전신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소속의 이의상이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의 이학림이 당선되었으나 이학림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4대 국회의원은 민주당 소속의 김주묵이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 시기]
제2공화국 시기의 정당 활동은 전국적으로 1960년 7월 29일 총선거에서 압승한 민주당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이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져 반목하다가 결국 구파에 의해 신민당이 창당됨으로써 상호 대립하였다. 그 외 제1공화국 자유당 잔류파가 중심이 된 공화당, 진보 정당인 한국사회당과 사회대중당 등도 활동하였다.
충청북도 음성 지역은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3명의 후보(사회대중당의 신창균, 민주당의 구철회, 자유법조단의 김홍관, 무소속의 고용식·신이철·반석홍·정석헌·이정석·정인승·오병호·권영중·남영우·이학림)가 입후보하여 무소속의 이정석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정석 후보자의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에 의한 의원 자격 상실로 무소속의 정인소가 승계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국회에 등원하지 못하였다.
이 시기의 정당 활동은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가 붕괴됨과 더불어 폭발한 국민들의 투표 욕구를 집권당인 민주당이 효과적으로 산출해내지 못함으로써 여러 이익 집단의 정치적 활동에 오히려 압도되었다. 결국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정변으로 인해 정당 활동이 일정기간 동안 정지되기에 이르렀고 음성 지역에서의 정당 활동도 이러한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3공화국 시기]
1962년 12월 군사정부는 민정 이양을 위하여 대통령책임제와 단원제 국회를 골격으로 한 헌법 개정안을 확정하였다. 이어 1963년 1월 1일부터 정당 활동이 재개되어 5·16 주도세력이 중심이 된 민주공화당과 재야 정치인들이 중심이 된 민정당, 민주당, 신정당, 자유민주당 등이 창당되었다.
제3공화국 시기 음성 지역에서는 오원선과 이정석이 중심이 되어 민주공화당의 정당 활동을 주도하였고, 이충환의 경우 민정당(초반기)과 신민당(후반기)의 정당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 외 국민의당 정당 활동은 정운갑이, 민주당의 정당 활동은 김진백이, 자유민주당의 정당 활동은 구철회 등이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실시된 3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는 민정당의 이충환이, 제7대 국회의원으로는 민주공화당의 오원선이, 8대 국회의원으로는 민주공화당의 이정석이 각각 당선되었다.
[제4공화국 시기]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와 5월 27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장기 집권과 성장 우선의 경제 정책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표출됨으로써 간신히 승리하였다. 이에 비해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김대중 후보의 선전에 이어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선전하여 89석을 확보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특별 선언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정치 활동을 전면 중지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른바 ‘유신체제’라는 극단적인 권위주의체제의 구축을 통해 기존의 정당 활동을 극도로 위축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제4공화국 시기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하여 여야 동반당선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이전의 경쟁적인 정당 활동의 대폭적인 완화를 유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거 유세에 대한 대폭적인 제한 조치의 발동과 기타 여러 가지 조치를 통하여 정당 활동을 상당 부분 제약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의 정당 활동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유정회 포함)과 야당인 신민당의 대결 구도를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진보 세력인 민주통일당도 소수파로 활동하였다. 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는 민주공화당의 경우 김원태와 오용운이, 신민당은 이충환이, 민주통일당은 오성섭이 각 소속 정당의 정당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실시된 2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북도 음성군과 진천군을 통합한 충청북도 제4선거구의 제9대 국회의원으로는 민주공화당의 김원태와 신민당의 이충환이, 제10대 국회의원으로는 민주공화당의 오용운과 신민당의 이충환이 각각 당선되었다.
[제5공화국 시기]
1979년 야당인 신민당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하였으나 얼마돼지 않아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태는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는 다시 부마항쟁의 대처 방법을 놓고 권력 핵심의 내부 분열을 일으켜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유신체제의 와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로 인한 정치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가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최규하 정부는 ‘위기관리정부’로서 새로운 정치 체제를 수립할 임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러한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결단력 있는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전두환 주도의 신군부 세력에 의해 권력을 찬탈 당하였다. 이로써 일시 회복 기미를 보인 한국 정당의 정당 활동은 신군부에 의해 다시 침체 국면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데 이어 9월 27일에는 정부의 헌법 개정안이 공고되었고 10월 27일에는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1981년 2월 11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가 실시되고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회의에서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제5공화국 초기에는 신군부 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주정의당, 구 신민당 계열의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주한국당, 그리고 구 민주공화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국국민당이 정당 활동의 중심축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 후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의 정치규제자들이 해금되면서 신한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창당됨으로써 제5공화국 초기의 두 야당을 대체하여 민정당과 더불어 새로운 정당 활동의 중심축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신한민주당이 다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분당됨으로써 제5공화국 후반기의 한국 정당체제는 4당체제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는 민주정의당은 안갑준, 민주한국당은 허탁이, 한국국민당은 김완태, 신한민주당은 서광열, 신민주공화당은 고경수가 각 소속 정당의 정당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실시된 2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1대 국회의원으로는 민주정의당의 안갑준과 한국국민당의 김완태가, 제12대 국회의원으로는 민주정의당의 김종호와 한국국민당의 김완태가 각각 당선되었다.
[제6공화국 시기]
신군부 세력 주축의 민정당은 제5공화국 말기에 노태우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전통 야당은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와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를 중심으로 분열 및 재편성되었다. 5·16과 유신 세력은 김종필 총재를 중심으로 신민주공화당으로 재집결하였다.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4색 4당의 구도 속에서 신군부 세력인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도 불구 한국의 정당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정당은 총 299석 중에서 125석을 차지한데 비해, 야당은 평화민주당이 70석, 통일민주당이 59석,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각각 획득하였다. 이로써 한국 정치는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를 탄생시켜 본격적인 정당 정치가 전개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90년 보수대연합으로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다. 그러나 통합신당인 민주자유당은 1992년 3월 25일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 299석 중 지역구 116석, 전국구 33석 등 총 149석을 얻어 과반수의석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는 제13대 총선에서 3당이 획득한 219석보다 70석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통합신당인 민주자유당이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제6공화국 초기에는 한국의 정당 정치가 신군부 세력 중심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 중심의 통일민주당, 김대중 중심의 평화민주당, 김종필 중심의 신민주공화당의 4당체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함으로써 다시 여대야소의 국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당시 야당으로는 평화민주당 외에 정주영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통일국민당 및 기존의 통일민주당의 잔류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이 활동하였다.
이 시기 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는 민주정의당은 김완태가, 신민주공화당은 이재철, 평화민주당은 신광열, 민주당은 허탁이, 신정치개혁당은 이인수가 각 소속 정당의 정당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실시된 2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3대 국회의원으로는 민주정의당의 김완태가 당선되었으나 임기 중 병사함에 따라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의 허탁이 당선되었으며, 제14대 국회의원으로는 민주자유당의 민태구가 각각 당선되었다.
[문민정부 시기]
1993년 2월 25일 3당 합당을 배경으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김영삼은 군사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해온 대표적 지도자로서 민주자유당 내 군부 세력을 일소하면서 한국 정치에서 새로운 문민 정치시대를 열면서 기존의 5·6공 군부 세력과의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이 시기 한국의 정당 정치는 민주자유당 외에 1995년 1월 김종필이 탈당하여 새롭게 창당한 자유민주연합과 정계를 은퇴하였던 김대중이 이전에 이기택과 함께 창당하였던 민주당 내 자신의 추종 세력을 이끌고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 및 김대중 추종 세력이 빠져나간 민주당을 중심으로 다시 4당 체제를 형성하였다. 한편 민주자유당은 이회창, 박찬종 등 주요 인사들을 영입하여 1996년 2월 7일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하였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이 139석,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 자유민주연합이 50석, 민주당이 15석, 무소속이 16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이어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한나라당으로 합당하였고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도 선거 연합을 형성하여 대통령 선거에 임하였다.
이 시기 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는 신한국당의 경우 민태구가, 새정치국민회의는 박병남이, 자유민주연합은 정우택이, 민주당은 구자웅이 각 소속 정당의 정당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실시된 한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5대 국회의원으로 자유민주연합의 정우택이 당선되었다.
[국민의 정부 시기]
1998년 2월 25일 DJP연합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 교체에 의해 탄생한 정권으로서 의의가 있었다. 이후 2000년 4월 13일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종래의 선거와는 달리 TV 등의 미디어를 이용한 정당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선거였으며, 또한 400여 개의 시민 단체가 연합한 총선시민연대가 유래가 없는 공천 반대 운동과 낙선 운동을 전개한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어서 115석을, 자유민주연합은 17석을, 야당인 한나라당은 133석을 각각 확보하였다. 이 시기 음성 지역에서는 새천년민주당의 경우 김진선이, 한나라당은 이충범이, 자유민주연합은 정우택이, 민주국민당은 장병수가 각 소속 정당의 정당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민주연합의 정우택이 당선되었다.
[참여정부 시기]
2002년 12월의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다시 이합집산을 거듭하였고 이후 실시된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이듬해인 2003년 2월 25일 참여 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2004년 3월 12일에는 선거법 위반, 측근 비리, 경제 파탄 등을 이유로 헌정 사상 초유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은 인정하지만 탄핵 사유에 해당할 만한 중대한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 내림으로써 탄핵소추는 기각 되었다. 2004년 4월 15일의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국회가 노대통령의 탄핵소추를 의결하고 이를 헌법재판소에 회부하여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에 실시된 선거로 탄핵소추 의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문제가 선거의 최대 쟁점이 되었다.
선거 결과는 전체 의석 299석 중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 한나라당이 121석, 민주당이 9석, 자민련이 4석, 민주노동당이 10석, 국민통합 21이 1석, 무소속이 2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선거 이전에 불과 47석에 불과하였던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의 세대 교체가 대폭적으로 이루어진 선거였다. 이 시기 음성 지역에서는 열린우리당의 경우 김종률이, 한나라당은 오성섭이, 자유민주연합은 정우택이 각 소속 정당의 정당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의 김종률이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