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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26
한자 政治
영어음역 Jeongchi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오승용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지역민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공동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 사회에는 다양한 이해 관계로 인하여 항상 희소 자원의 획득과 배분을 둘러싼 대립이나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이나 투쟁을 조정하여 통일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정치라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정치는 주로 국가나 정부라는 제도적인 권력 장치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정치는 좁게는 국가 권력에 의해 수행되는 일련의 통치 행위이며, 넓게는 자신의 이해 관계를 공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국가 권력의 획득·유지·행사를 둘러싼 제집단간의 투쟁이나 조정 과정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라북도 고창군의 정치는 주로 국가 기구에 파견할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전라북도 고창군의 정치를 선거와 정당 및 정치 관련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선거]

1. 대통령 선거

1) 제13대 대통령 선거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고창군 지역에서는 김대중 5만 5130표, 노태우 5,837표, 김영삼 700표, 김종필 235표, 신정일 85표로 김대중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2) 제14대 대통령 선거

1992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전라북도 고창군 지역의 경우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가 4만 6557표로 가장 많이 득표하였고 다음으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 2,323표,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 1,704표, 무소속의 김옥선 후보 751표, 신정당의 박찬종 후보 238표, 무소속의 백기완 후보 182표, 정의당의 이병호 후보 98표 순이었다.

3) 제15대 대통령 선거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고창군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4만 6567표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다음으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1,659표,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 728표, 바른정치연합의 김한식 후보 513표,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 145표, 한국당의 신정일 후보 122표 순이었다.

4)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년 12월 19일에 실시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고창군 지역에서도 노무현 후보가 3만 6477표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였고 다음으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2,192표, 호국당의 김길수 후보 594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372표, 하나로연합의 이한동 후보 142표, 사회당의 김영규 후보 43표 등의 순이었다.

5) 제17대 대통령 선거

2007년 12월 19일에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고창군의 경우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가 2만 8901표[85.2%]로 1위를 차지했으며 다음으로 이명박 후보가 2,308표[6.8%], 무소속 이회창 후보가 1,237표[3.64%],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가 559표[1.64%]를 각각 획득하였다.

2. 국회의원 선거

1) 제헌의회 의원 선거

고창군의 경우 2인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어 갑과 을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갑구에는 고창읍을 비롯하여 고수면·성송면·무장면·대산면·공음면·상하면이, 그리고 을구에는 아산면·해리면·심원면·부안면·흥덕면·성내면·신림면이 포함되었다. 고창 역시 전국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정당 사회단체 후보들이 출마했으며 갑구에서는 무소속의 김영동 후보가, 을구에서는 한국민주당의 백관수 후보가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조선전업사원의 경력을 가진 노동자 출신 무소속의 김영동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급진적인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지하에서 많이 활동하고 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출생한 무장면은 당시에는 고창군 인민위원장이 나올 만큼 진보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을구에서 당선된 한국민주당의 백관수 후보는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인물로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 민주의원(民主議院)의원, 입법 의원이 되었으며 제헌 국회에서는 초대법제사법위원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평안북도 선천(宣川) 결핵요양병원에서 장기요양 생활을 하다 숨졌다. 향년 62세였다.

2)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 갑구의 경우 무려 10명의 후보들이 출마했으며 교토제대[京都帝大]를 졸업하고 상공부 차관을 지낸 김수학 무소속 후보와 제1대 국회의원 이었던 국민당의 김영동 의원 그리고 씨족이 많은 정태환 무소속 후보 간의 경쟁으로 압축되었으나 관록의 김수학 후보가 무난히 당선되었다. 을구 역시 11명이나 출마하여 후보들이 난립했으며 제헌국회에서 초대법제사법위원장을 지낸 백관수 국민당 후보가 유력한 것으로 보였으나 대한항공사장으로 자금력이 강한 신용욱 무소속 후보가 262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면장을 지낸 흥덕면의 박홍근 무소속 후보가 3위를 차지하였다.

3)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군 갑구의 경우 7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나 을구에서는 3명이 출마하여 갑구보다는 경쟁이 덜했다. 갑구에서는 전국적 흐름을 탄 자유당 소속의 진의종 후보와 막강한 씨족 세력을 가진 정세환 무소속 후보간의 경쟁이었다.

젊은 지식인으로 집권당의 공천을 받은 진의종 후보는 젊은층을 파고들어 지지기반을 확보해 나갔으나 대산, 무장 등 갑구 지역에 많은 성씨를 가진 정세환 후보를 따라 잡지 못하고 255표차로 석패하였다. 물론 갑구의 정세환 후보 역시 일본 정치대학을 졸업한 신지식인으로 주민의 지지를 받을만했지만 씨족의 지원이 당선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혈연주의가 선거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을구의 경우에는 자유당의 현역 의원인 신용욱 후보와 무소속의 홍순희 후보 간의 경쟁이었으나 신용욱이 당선되었다.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젊은 지식인이었던 홍순희 후보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자유당 공천의 신용욱 후보를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로써 신용욱 후보는 고창군 국회의원 역사상 처음으로 재선의 기록을 세웠다.

4)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제4대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고창군에서는 당시 투표의 일반적 현상이었던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갑구에서는 무소속의 정세환 후보가 당선되었고 을구에서는 야당인 민주당 홍순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정세환 후보가 자유당의 진의종 후보를 근소한 차이지만 누르고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정씨문중(鄭氏門中)의 지원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정씨 자신이 소탈하여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을구에서 재력도 강하면서 여당인 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신용욱 현역 의원이 낙선하였다. 낙선의 원인은 신용욱 후보가 현역 의원으로서 보여준 실적에 주민들의 실망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권력 남용이 많은 지지자들의 이탈을 가져왔고 더불어 젊은 홍순희 후보에 대한 주민들의 동정심도 신용욱의 3선 실패의 주 요인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5)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군의 민의원 선거에서 갑구는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유진 후보가, 을구는 무소속의 김상흠 후보가 당선되었다. 갑구에서 당선된 유진 후보는 당시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그의 저서인 『구문론』이 대학 입시생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리고 전국적 대세였던 민주당의 공천을 받았다는 것이 결정적 승인으로 작용했고 대학 교수로서의 신선한 이미지와 유씨 종친들의 지원도 한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근소한 표차로 두 번이나 정세환 후보에게 연속하여 고배를 마신 진의종 후보는 이번에도 유진 후보에게 단 25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무소속으로 처음 출마하여 을구에서 당선된 김상흠 후보는 선친 김성수의 후광에 크게 힘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수는 2대 부통령을 역임했고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고창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김상흠처럼 부친의 후광을 업고 정계에 진출한 대표적인 예로는 조병옥의 아들인 조윤형과 신익희의 아들인 신하균을 들 수 있으며 당시 정계에서는 이들을 ‘삼총사’라 불렀다. 고창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김상흠이 고창을 연고지로 국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가 뿌린 씨를 후손이 거두도록 기회를 주는 당시 정치 풍토 또는 정치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6)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군 선거구는 새 개정법에 따라 2개의 선거구에서 1개의 선거구로 축소되었다. 선거인수는 8만 9827명이었고 투표자는 6만 5987명으로 73.5%의 투표율을 보였다. 투표자 중에서 무효 투표가 1,903명에 이르러 그 당시에 무학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선거에서도 고창에서는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야당인 민정당 김상흠 후보가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성정기 후보를 149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김상흠 후보의 당선은 제5대 국회가 5·16 군사정변으로 말미암아 단명으로 끝났기 때문에 다시 국회에 보내야 한다는 동정여론과 김성수의 후광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깝게 패한 성정기 후보는 1963년 12월 5일 개표 및 개표 부정을 이유로 들어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정진홍에 상대로 당선 무효 소송을 제기했으나 1964년 12월 10일 원고 소 취하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로써 김상흠 후보는 재선이 최종 확정되었다.

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군의 경우 투표율은 82.6%로 전국 투표율 76.1%보다 높았다. 무효 투표의 수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보다도 1,516표 늘어난 3,419표였다. 이는 집권당이 오직 당선만을 목적으로 무리하게 투표에 동원시킴으로써 빚어진 결과라 볼 수 있다. 민주공화당 신용남 후보가 5대, 6대의 국회의원이었던 신민당 김상흠 후보를 1만 2151표 차로 누르고 승리하였다.

신민당의 김상흠 후보와 사회당의 손명섭 후보는 민주공화당의 부위원장이었던 정규윤(丁奎潤)의 당선 및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법원이 선거 전부를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같은 해 9월 24일에 보궐 선거를 실시했으며 지난 선거 때보다 2명이 늘어난 7명이 출마하였다.

정규 선거에 출마했던 자유당의 정세환 후보와 통일사회당의 손명섭 후보가 재출마를 포기한 대신 정의당의 임균석(林均錫) 후보, 자민당의 손일권(孫一権) 후보, 통일 사회당의 유영봉(兪永峯) 후보, 그리고 3, 4대 민의원을 지낸 바 있고 대통령에 출마하여 낙선했던 통한당의 오재영(呉在泳) 후보가 가세하였다.

선거 결과 대중당의 간판을 걸고 재출마한 신용남 후보가 3만 2563표를 얻어 신민당의 김상흠 후보를 3,519표차로 누르고 다시 승리하였다. 두 번의 선거에서 당락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이전의 선거와는 달리 당선자와 차점자 간의 표차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8)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군의 경우 투표율은 79.9%로 전국의 73.2%보다 높았으나 무효표는 3,161표로 아직도 높은 수준이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의 신용남 현역의원과 신민당의 진의종 후보, 그리고 민중당의 안종엽 후보가 출마하여 신민당의 진의종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진의종 후보는 유효투표 6만 6805표 중에서 4만 765표를 얻어 전체 61.0%를 차지함으로써 여유 있게 당선되었다. 이로써 진의종 후보는 32세의 나이에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낙선 한 이후 제4, 5대 선거에서도 낙선했으나 제8대 선거에서처음으로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였다. 1972년에 단행된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의원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9)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군의 경우는 부안군과 한 선거구가 되어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정변의 주체 세력으로 실세였던 김제 출신의 장경순과 부안군의 이병옥이 김제군과 부안군의 합병을 반대하여 고창군과 부안군, 정읍군과 김제군이 각각 한 선거구가 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2명을 선출하는 선거 방식이었기 때문에 제1당과 제2당의 동반 당선이 거의 확실히 되는 상황에서 부안군에서는 집권당의 실세인 민주공화당의 이병옥 후보가, 고창군에서는 제1야당의 신민당 김상흠 후보가 출마하였고 무소속으로 부안군에서 김정기 후보와 고창군에서 진의종 후보가 출마하였다.

그러나 제1야당의 김상흠 후보는 제일 저조한 득표로 낙선하였다. 그가 낙선하고 무소속의 진의종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제 5, 6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흠 후보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김상흠 후보는 평상시에 지역구 관리에 소홀하다가 선거철만 되면 중앙에서 공천을 받아 낙하산식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주민들의 호감을 얻지 못하였다.

반면 진의종 후보는 제3, 4, 5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근소한 표차로 계속 낙선하다가 제8대에 들어 제1야당인 신민당의 공천을 얻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으나 유신으로 인해 1년여 만에 의원직을 사임해야 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이에 대한 유권자들의 동정이 그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한국전력이나 상공부에 근무할 때 다수의 고창 출신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선거의 기반을 착실하게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

10)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군의 경우 9대 선거에서처럼 부안군과 한 선거구였으며 선거인수는 부안군이 7만 5228명이었고 고창군은 부안군보다 4,038명 많은 7만 9266명 이었다. 투표율은 고창군이 88.6%로 부안군의 79.8%보다 높았다. 고창군에서는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이호종 후보와 신민당의 공천을 받은 진의종 현역의원 그리고 무소속의 정균환 후보가 출마했으며 부안군에서는 재력이 좋은 것으로 소문난 무소속의 박용기 후보와 역시 무소속인 김종수 후보 그리고 민주통일당의 김일범 후보가 출마하였다. 고창에서 3명, 부안에서 3명씩 출마하여 6명이 자기 지역을 기반으로 경쟁하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 고창군의 경우 집권당인 민주공화당과 제1야당인 신민당 후보가 맞붙는 결전장이 되어서 고창군의 표를 비교적 고르게 가졌으나 부안군의 경우 무소속의 박용기 후보가 부안 출신의 타 후보들 보다 훨씬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다. 투표 결과 무소속의 박용기 후보가 3만 6941표를 얻어 최고 득표자가 되었고 고창 출신의 이호종 후보는 3만 6478표를 얻어 차점자가 되어 동반 당선되었으며 고창군의 이호종 후보는 처음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군의 경우 선거구에 변화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부안군과 한 선거구였으나 이번에는 정읍군과 한 선거구가 되었다. 정읍군과 한 선거구가 됨으로써 고창군 출신의 후보들은 많은 난관을 겪어야 했다. 지역 연고가 투표 행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유권자수가 월등히 많은 정읍 출신의 후보가 유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창군의 경우 유권자수가 7만 6411명이었으나 정읍군의 유권자수는 11만 7898명으로 4만 1487명이 더 많았다. 투표 참여율도 유권자수가 더 많은 정읍군이 81.8%로서 고창군의 80.9% 보다 조금 높았다.

고창군에서 출마한 후보는 민주당의 조병후 후보, 민주정의당의 진의종 후보, 신정당의 신정재 후보, 한국국민당의 이호종 후보, 무소속의 노동채 후보 등 5명이었다. 정읍군에서는 원일민립당의 이경태 후보, 민주한국당의 김원기 후보 등 2명이었다.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의 진의종 후보가 6만 1443표를 얻어 1등으로 당선되었고 민주한국당의 김원기 후보가 4만 1789표를 얻어 2등으로 당선되었다. 비록 낙선되었지만 그 뒤를 이어 제10대 국회의원이었던 이호종 후보가 2만 316표, 무소속의 노동채 후보가 1만 6280표를 얻었다.

12)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고창군은 1981년 7월 1일 시(市)로 승격한 정주시, 그리고 기존의 정읍군과 한 선거구가 되었다. 고창이 유권자수에서 정읍에 불리했으나 고창의 연고지로 출마한 전종천 후보가 1위를 차지하였다. 전종천 후보는 출생지는 고창 일지라도 정읍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집주소도 정읍으로 되어 있어 연고지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전종천 후보는 유권자수가 많은 정읍에서도 표를 많이 얻을 수 있었고 고창에서는 단독 후보로 인식되어 표를 독식해 최다 득표를 할 수 있었다.

총 유효 투표 16만 911표 중에서 전종천 후보는 6만 8248표를 얻어 1위로 당선되었고 정읍에서 출마한 유갑종 후보가 3만 7688표로 2위를 차지하여 동반 당선되었다. 유갑종 후보는 제8대 국회에 진출했으나 유신으로 인해 1년여 만에 의원직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정정법(政浄法)에 묶여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할 수 없었으며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의 공천을 얻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신민주당을 창당하여 출마하였다.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에 대한 정읍 시민들의 동정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한편 신한민주당의 공천을 놓고 이원배와 김원기가 치열한 경합을 벌였으나 이원배가 공천을 받았고 김원기는 민주한국당의 후보로 출마해 이원배 후보보다 135표 많은 2만 6449표를 얻었다.

13)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에서는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14석 모두를 싹쓸이 했다. 싹쓸이 현상은 광주와 전라남도에서도 공통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고창군의 경우 이전과는 달리 최다 득표자 1명만을 선출하는 단일 선거구였다. 총 4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경쟁하였다. 투표율은 81.6%로 전국 평균인 75.8%를 상회했다.

평화민주당의 정균환 후보는 유효 투표 5만 7425표 중 과반수가 넘는 3만 1188표를 얻어 타 후보들을 여유 있게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정균환 후보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셨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평화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에 성공하였다.

정균환 후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황색바람이라고 불리는 평화민주당의 돌풍이 고창 지역에서도 거세었기 때문이었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모든 선거구에서 평화민주당이 압승을 거뒀다. 이 외에도 정씨 문중의 지지와 고창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연의 지원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4)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의 경우 지역구 의원 14석 중에서 민주당 12석, 민자당이 2석씩을 얻음으로써 전국적 흐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즉 전라북도는 야당인 민주당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민자당 당선자는 남원시·남원군 지역의 양창식 후보와 진안·무주·장수 지역의 황인성 후보였다.

고창 선거구에서는 민자당의 이호종 후보와 민주당의 정균환 후보 그리고 국민당의 노동채 후보가 경쟁하였다. 유권자들은 민자당의 이호종 후보와 민주당의 정균환 후보 간의 접전을 예상했으나 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정균환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였다. 정균환 후보는 민주당을 선호하는 지역 정서에 힘입어 8,193표 차이로 민자당의 이호종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5)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전라북도의 경우 14명의 당선 의원 중에서 국민회의가 13명을, 그리고 신한국당이 나머지 1명을 차지해 전라북도 지역이 국민회의의 텃밭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정당별 득표율은 국민회의가 도내 총 득표수 93만 7524표 중 57만 9812표를 획득하여 지난 14대 총선에서 당시 민주당이 획득한 비율보다 9.5% 높은 63.7%였다.

신한국당은 14대 민자당 보다 7.9% 떨어진 23.4%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전라북도 내에서 12명의 후보를 낸 민주당은 5.7%를 기록하였고 2명의 후보를 낸 무당파 연합과 자민련은 0.8%와 0.5%의 낮은 득표율을 보였다. 국민회의 텃세가 강한 풍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군산시 을에서 유일하게 당선된 강현욱 후보는 2위 국민회의 강천선 후보를 6,226표차로 누르고 낙승하였다. 강현욱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이전 해에 있었던 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해 선거민들의 동정과 인물론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창의 경우도 전라북도 지역과 같이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회의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분위기였다. 신한국당의 김주섭 후보는 국민회의 정균환 후보에게 도전하였으나 국민회의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정규환 후보와 김주섭 후보의 표차는 1만 4182표였다.

16)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에서는 김대중이 이끈 민주당 바람이 너무 센 탓으로 10명의 당선자중 민주당이 9석을, 무소속이 1석을 차지했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남원의 이강래 의원도 김대중계로 분류되어 전라북도는 친 김대중계가 싹쓸이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 후보들이 전라북도 지역에서 획득한 총 투표수는 55만 5462표로서 총 득표수 86만 2485표의 65.44%를 차지했으며 한나라당은 전체 투표수의 3.59%에 해당하는 3만 442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리고 자민련이 2만 8675표[3.38%], 민국당이 1,811표[0.21%], 무소속이 23만 2459표[27.39%]를 획득하였다.

고창군과 부안군이 한 선거구로 되었으며 고창 지역에서 2명, 부안 지역에서 4명의 출마자가 나서 총 6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고창과 부안의 유권자 수가 거의 같았고 따라서 2명이 출마한 고창 출신의 후보자가 유리한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 데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끈 민주당의 바람이 워낙 강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창 출신의 민주당 정균환 후보가 당선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민주당 정균환 후보는 부안에서 고르게 표를 얻은 다른 후보들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정균환 후보는 고창 지역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4선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17)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호남의 경우 민주당과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간 열린우리당 간의 접전으로 예상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이후 분위기는 완전히 열린우리당 편이었다. 그 결과 전라북도의 11석을 열린우리당이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고창·부안 선거에서는 고창에서 3명이 출마하였고 부안에서는 5명이 출마하여 수적으로 보면 고창에서 출마한 후보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부안에서 출마한 열린우리당의 김춘진 후보가 4,124표차로 민주당의 정균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18대 국회의원 선거는 전국적으로 한나라당이 압승한 가운데 고창군에서는 통합민주당의 김춘진이 한나라당 김종훈과 평화통일가정당의 서동주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김춘진 후보는 치과 의사로 정치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열풍을 타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재선에 성공하였다.

3. 지방 선거

1)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991년에 치러졌던 지방 선거는 지방 의회 의원만을 선출한다는 점에서 미완성의 지방 자치 선거였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정치 개혁을 위해서는 선거 제도 개선을 통한 선거 혁명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1994년 여·야의 합의에 의한 통합선거법인 「공직 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지방 의원뿐만이 아니라 지방 자치 단체장도 주민들의 손에 의해 선출되도록 규정했으며, 이 법에 의해 1995년 6월 27일에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시·도 단체장 15명과 230명의 구·시·군 단체장들이 선출되었다.

선출직 의원은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정하는 주민에 의한 직접 선거에 의한 선출방식이었고 비례 대표 의원은 정당별 득표 비율에 의해 선출되는 간접 선출방식이었다. 이 선거에서 972명의 시·도 의원이[지역구 875명, 비례 대표 97명], 구·시·군 의원 4,304명이 선출되었다. 시·도단체장과 시·도의원 및 구·시·군단체장 선거에서는 정당 공천이 허용되었으나 구·시·군의원 선거에서는 정당 공천이 허용되지 않아 다소간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참여 정당은 집권 여당인 민주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등 3개 정당이었으며 지방 선거라는 특성상 무소속 출마가 많았다.

선거 결과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여전히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정당 선호 경향이었고 야당이 우세를 보였으며 그리고 극심해진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었다. 전라북도 지방의 경우 지역주의가 극명하게 표출된 선거였다. 민주당은 도의원 52석과 자치 단체장 15석 중 도의원 3석과 자치단체장 1석을 무소속 후보에게 내어주었을 뿐 나머지 63석을 싹쓸이함으로써 전라북도 지역이 민주당의 아성임을 입증하였다. 기초 의원의 경우 민주당의 내천을 받지 못했지만 다행히 민주당의 기호인 2번을 받아 당선된 무소속 출신이 많았던 점으로 볼 때 지역주의가 얼마나 기승을 부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창군수 선거의 경우 지역 정서가 좋은 민주당의 정길진 후보와 무소속의 이호종 후보 간의 경쟁이었으나 무소속 이호종 후보가 경륜을 바탕으로 민주당 바람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도의원 선거는 3개 선거구에서 각 1명씩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였는데 전 선거구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전원 당선됨으로써 민주당의 바람을 실감하게 하였다.

제1선거구와 제2선거구에서는 민주당의 최백규 후보와 최강선 후보가 현역과 민주당 공천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쉽게 당선될 수 있었으나 제3선거구에서는 민자당의 임동규 후보와 현역 의원인 민주당의 김용원 후보 간에 치열한 접전이었다. 민주당의 김용원 후보가 661표차로 임동규 후보를 누르고 신승하였다.

군 의원 선거에서도 정당 공천이 허용되지 않아 전원 무소속 출마였지만 암암리에 정당 내천을 받은 친민주당 후보들이 민주당 선호의 지역 정서를 업고 다수 당선되었다.

2)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제1회 동시지방선거가 있은 지 3년 만에 치러졌다. 지방선거는 국회의원 임기 기간 중간에 치러져야 한다는 여론 때문에 1년 앞당긴 1998년 6월 4일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시·도 단체장 16명, 구·시·군 단체장 232명, 시·도의원 690명[지역구 616명, 비례대표 74명], 구·시·군의원 3,467명이 선출되었다.

단체장과 광역·기초의원은 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하는 직접 선출 방식이었고 시·도의원 중 비례 대표 의원은 정당별 득표 비율에 의해 당선자가 결정되는 간접 선출 방식이었다. 이 선거는 여·야간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1997년 대통령 선거 이후 처음 실시되는 선거로서 시기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심각한 경제 위기와 변화에 대한 책임론, 그리고 여소 야대의 정국에 대한 중앙의 정계 개편의 길목이라는 의미에서 지방 선거가 지방 자치 발전을 위한 의제 설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단순히 중앙 정치의 대리전이라는 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또한 동시 선거의 특성상 지방 의원선거는 단체장 선거에 밀려 정치권이나 주민의 관심이 소홀하여 투표율이 역대 선거 사상 두 번째로 낮은 52.6%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 지방 선거와 관련하여 대도시에서의 투표율이 크게 하락하여[광역시에서는 20% 안팎, 도에서는 10% 전후] 한국 선거 행태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투표 참여의 도저촌고(都低村高) 현상이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또한 지역주의 구도가 뚜렷해 전체적으로 영남-한나라당, 호남-국민회의, 충청-자민련의 양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지역 단위 16곳 모두에서 광역단체장과 의회 다수 정당이 일치되는 지방 자치 1당 지배 현상을 보인 것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차원에서 우려를 낳았다.

전라북도 지역의 경우 현역이 강세를 보였다. 단체장의 경우 현역 11명 모두가 당선되었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5명의 단체장도 모두 당선되었다. 현역이면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군산시의 김길준 후보, 정읍시의 국승록 후보, 김제시의 곽인희 후보, 진안군의 임수진 후보, 그리고 무주군의 김세웅 후보 등이 국민회의의 바람을 잠재우고 당선되었다.

광역의원 선거에서는 34개의 선거구중 국민회의가 32개를 휩쓸었다. 무소속 후보로 도의원에 당선된 후보는 진안 1선거구의 정인철 후보와 부안 1선거구의 김종수 후보 두 명이었다. 고창군수 선거에서는 국민회의 이호종 현 군수와 무소속의 최백규 전 도의원이 경합했으나 현역과 정당의 프리미엄을 업은 이호종 후보가 무난히 당선될 수 있었다.

도의원 선거는 이전 선거와는 달리 1석이 줄어 2명만을 뽑았는데 역시 이 지역의 정서를 업은 국민회의 후보 2명이 모두 당선되었다. 제1선거구에서는 무소속의 김영석 후보와 무소속의 김용원 후보가 그리고 국민회의 이상복 후보가 경쟁했었으나 국민회의 이상복 후보가 두 무소속 경쟁자를 여유 있게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제2선거구에서는 국민회의 정길진 후보와 무소속의 최강선 후보가 경쟁하였으나 역시 국민회의 바람으로 정길진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군의원의 경우 정당 공천이 허용되지 않아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비공식적으로 국민회의의 내천을 받은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3)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2002년 6월 13일에 실시되었으며 시·도 단체장 16명, 구·시·군 단체장 232명, 시·도 의원 682명[지역구 609명, 비례대표 73명], 구·시·군 의원 3,485명이 선출되었다. 단체장과 광역·기초의원은 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했고 비례 대표 시·도의원은 정당별 득표 비율에 따라 의석 배분이 이뤄졌다.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요 정당의 대통령 후보자가 확정된 가운데 실시됨으로써 지역의 대표를 뽑는 지방 선거라는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 사실상 대통령 선거의 예비 성격을 띠는 등 종전의 지방 선거와는 상당히 다른 환경에서 실시되었다. 이전의 지방 선거와 제도적으로 다른 점은 시·도의원 선거에 정당 명부식 비례 대표제가 도입되어 유권자가 지지 정당에도 투표를 할 수 있는 1인 2표제를 처음 시행했다는 것이다. 또한 비례 대표 시·도의원 선거에서 후보의 5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하도록 의무화함으로써 여성의 정치 참여를 촉진시키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전라북도 지역의 경우 무소속 후보들이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 약진하였고 고령인 현역 단체장들이 낙선하였다. 무소속 단체장 당선자는 군산시장 강근호, 남원 시장 최진영, 임실군수 이철규, 순창군수 강인형, 부안군수 김종규 등이었다. 현역이면서 고령으로 낙선한 후보들은 익산시의 조한용, 정읍시의 국승록, 완주군의 임영환, 순창군의 임득춘, 고창군의 이호종, 부안의 최규환 후보 등이었다.

도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 후보가 이전 선거에서보다 약진하였다. 32곳의 선거구에서 국민회의 후보가 27석을 차지했고 나머지 5석은 무소속 후보에게 돌아갔다. 무소속이 당선된 곳은 무주 2곳, 순창 2곳, 고창 1곳이었다. 고창군수의 경우 민주당의 이강수 후보와 무소속의 현역 군수 이호종 후보 그리고 군의장 출신인 진남표 무소속 후보, 교수 출신인 무소속의 주재기 후보가 치열하게 경합하였으나 민주당 공천을 받은 이강수 후보가 현역 군수인 이호종 후보를 3,000여 표 차이로 누르고 승리하였다.

도의원의 경우 제1선거구에서는 민주당의 유병천 후보와 무소속의 정길진 후보 간의 경쟁이었으나 현역 의원인 정길진 후보가 민주당의 바람을 잠재우고 629표 차이로 신승하였다. 제2선거의 경우에는 민주당 공천을 받은 고석원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선전한 오교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군의원의 경우 역시 정당 공천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모두가 무소속 출마자였으나 내부적으로 민주당의 내천을 받은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4)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2006년 5월 31일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단순히 지방권력의 판을 짜는 차원을 넘어 정국의 풍향을 좌우하는 중대 분수령이 될 만큼 큰 의미를 지녔다. 2004년 17대 총선 이후 첫 전국 단위 선거이자 2007년 대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각 정치 세력이 격돌하는 최대 승부처라는 점에서 선거 결과가 향후 대선 구도와 기존 정치 지형 전반에 몰고 올 파장이 클 것이란 전망 속에서 치러진 선거였다.

열린우리당은 지방 일꾼을 뽑는 단순 지방 선거라면서 인물 중심의 투표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야당인 한나라당은 현 정부에 대한 국정 실패의 중간 평가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선거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참패였다. 열린우리당은 16개의 광역단체장에서 단 1석만을 건진 반면 한나라당은 12곳에서 승리하였다.

230개의 구·시·군의 장 선거에서도 열린우리당은 19석을 차지한 반면 한나라당은 155개 지역에서 승리하였다. 오히려 민주당이 20석을 획득함으로써 열린우리당보다 선전하였다. 시·도의원 선거에서도 이런 현상은 그대로 반영되었다. 655개 지역구에서 열린우리당은 33석을 차지한 반면 한나라당은 519개의 의석을 휩쓸었다. 그리고 민주당이 71석, 국민중심당이 13석을 차지했다.

열린우리당이 참패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2005년에 치러진 두차례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은 28대 0이라는 참담한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엎친데 덮진 격으로 5·31 지방 선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5월 20일 서울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유세도중에 괴한으로부터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열린우리당에 치명타가 되었다.

이 지방 선거는 지난 지방 선거에 비해 여러 측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기초 의원까지를 포함한 모든 지방 선거의 정당 공천 허용, 지역구 기초 의원 선거의 중선거구제 도입, 비례 대표 기초 의원 제도 신설, 지방 의원의 유급화, 선거 연령의 하향 조정[19세]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공천 과정의 공정성·투명성·신뢰성 제고를 통해 정당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공직 선거 후보자 선출 과정에서 상향식 공천 및 공천권의 지방이양, 당내 경선 실시 및 경선 불복 금지, 당내 경선 관리의 선거관리위원회 위탁 및 비용의 국가 부담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원 경선을 실시한 정당에서는 당비 대납 문제가, 공천 심사 기구에서 공천권을 행사한 정당에서는 공천 헌금 문제가 드러나는 등 부작용도 있었다.

또 하나 새로운 특징은 우리나라 선거에서 고질적으로 드러나는 지역·연고주의를 타파하고 정책 경쟁을 통한 유권자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시민단체와 언론이 주도하는 매니페스토[참공약 선택하기]운동이 추진되었고, 혼탁 선거를 뿌리 뽑기 위해 금품·향흥 제공을 신고하는 자에게 최고 5억 원까지 포상금을 지급할 수 있독 함과 동시에 향응을 받은 자에게도 50배의 과태료를 물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참정권을 확대하기 위해 3년 이상 영주 외국인 6,700여 명에게도 처음으로 투표권을 부여했으며 선거일 투표소에 가서 투표할 수 없는 자는 누구나 부재자 신고를 할 수 있도록 참정권의 요건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예비 후보자 제도를 도입하여 후보자에 대한 선거 운동의 자유를 대폭 확대하였다. 신인들도 선거 기간 전에 선거 사무소 설치 및 명암교부, E-mail 발송, 홍보물 발송 등을 허용하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선거 운동 방법도 거리 현수막 게시, 인터넷 광고 등 인터넷 이용 선거 운동 확대, 모양과 색상이 동일한 모자·티셔츠 착용 허용 등 규제를 완화하거나 현실에 맞게 조정 하였다. 선거 비용 제한액을 항목별 산정 방법에서 총액 산정 방법으로 변경하여 후보자 등이 총액의 범위 안에서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투표율은 지난 2002년의 48.9% 보다는 약 2.7%가 증가한 51.6%를 기록하였다. 전라북도의 투표율은 전국 평균인 51.6%보다는 높은 57.9%였으며 도지사의 경우 열린우리당 김완주 후보가 전체 투표수의 48.08%를 얻어 36.53%를 얻은 민주당 정균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시·군 단체장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이 4곳, 민주당이 5곳, 무소속이 5곳에서 승리하였다. 지역구 34명과 비례대표 4명을 뽑는 도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20석, 민주당 12석, 무소속이 2석을 차지하였고 비례대표는 열린우리당이 2석,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각 1석씩을 차지하였다.

지역구 173명과 비례대표 24명을 선출하는 시·군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85석, 민주당이 52석, 민주노동당이 6석, 무소속이 30석을 차지했으며 비례대표는 열린우리당이 11석, 민주당이 10석, 노동당이 3석을 차지하였다.

고창 군수의 경우 열린우리당 정길진 후보와 민주당 이강수 후보 그리고 무소속의 정원환 후보가 3파전을 벌였다. 현역 군수인 이강수 후보가 과반 이상을 득표하여 도의회 의장을 지낸 정길진 후보를 큰 표차이로 이겼다.

도의원 선거에서는 제1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의 진남표 후보와 민주당의 임동규 후보가, 그리고 제2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의 오교만 후보와 민주당의 고석원 후보가 각각 맞붙어 민주당 후보인 임동규 후보와 고석원 후보가 당선되었다. 고창군 의회 의원의 경우 열린우리당이 3석, 민주당이 4석, 무소속이 3석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고창군의 지방 선거는 민주당이 단체장과 도의원 모두를 석권했고 군의원에서도 열린우리당을 앞섰다.

5)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2010년 6월 2일 실시되었다. 고창군수의 경우 민주당 이강수 후보가 3선에 성공했다. 고창군 이강수 후보는 총 3만 6936표 중 2만 660표를 얻어 55.9%의 지지율을 보이며 무소속 정원환 후보와 평화민주당 박세근 후보를 눌렀다. 정원환 후보는 9,598표를 얻어 25% 득표율을 얻었으며, 박세근 후보는 5,547표를 얻어 15%의 득표율을 얻었다.

[정당 및 정치 관련 사회단체]

지구당이 폐지된 관계로 지구당 사무실을 개설하여 활동중안 정당은 없지만 2010년 현재 고창군에서 국회의원 후회원 사무실 등을 통해 활동하고 있는 주요 정당으로는 한나라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이 있다. 그리고 정치 관련 주요 지역 사회단체로는 한국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운동, 민족통일 전라북도협의회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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