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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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道京 |
영어음역 | Bak Dogyeong |
이칭/별칭 | 경래(慶來),화옥(化玉),경화(京和)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307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성미 |
성격 | 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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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307 |
성별 | 남 |
생년 | 1874년 3월 23일 |
몰년 | 1910년 2월 8일 |
본관 | 밀양 |
[정의]
개항기 고창 출신의 의병장.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화옥(化玉), 호는 경화(京和), 이명(異名)은 경래(慶來)이다. 도경(道京)은 아명이다. 1874년 3월 23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307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준식(朴準植)이다.
[활동사항]
박도경은 한미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언변과 기개가 뛰어났다고 한다. 1905년 을시조약이 체결되자 고창 문수사에 주둔하고 있던 기삼연(奇參衍) 의병대의 종사관이 되어 의병을 이끌고 모양현을 습격하여 무기고를 탈취하였다. 당시 의병대의 희생이 많아 무기를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자, 박도경은 무기를 감추고 뒷날을 도모하였다.
이후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전수용(全垂庸)·김치곤(金致坤) 등과 뜻을 같이하며 전라남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1907년 9월 전라남도 영광에서 포사대장(砲射隊長)으로 활약하였고, 장성에서 20여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여 42명을 살해하였다.
1908년 1월 의병장 기삼연이 광주에서 순국하자, 박도경은 격문을 돌리고 김공삼(金公三)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본진(本陣)을 세운 뒤 포사장(砲士將)이 되었다. 이어 김공삼을 선봉, 김일문(金一文)을 포장(砲將)으로 임명하고 의진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기삼연이 죽은 후 의진이 나뉘면서 의병들의 의기가 다소 감소되는 듯하자, 박도경은 김공삼과 의논하여 여러 진을 합하여 강대한 세력을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후 제일 먼저 김영엽(金泳燁)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진을 합친 뒤 광주를 습격하여 기삼연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김영엽이 유종여(柳宗汝) 등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박도경은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손룡산(巽龍山)으로 들어가 하수인 두 명은 죽였으나 유종여는 놓치고 말았다.
이후 박도경은 군사를 이끌고 다시 장성으로 돌아와 군사를 교련하면서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동안 기삼연 의진에서 함께 활약했던 김준(金準) 등이 광주 어등산에서 순국하는 등 의병 활동이 점차 어려워졌으나 1909년경 그의 의진의 규모는 다소 확대되었다. 이는 1909년 2월 1일 부하 박양일(朴兩日)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박도경은 부하 110명·선봉장 이도운(李道雲)·중군장 손도연(孫道演)·도시장(都十將) 구연역(具連譯) 등과 좌우익장(左右翼將) 및 참모를 거느렸다.”고 증언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박도경 의진은 총 139정·칼 24본 등을 갖춘 비교적 무력이 강한 편에 속했다고 한다.
박도경은 대체로 남포와 부안 등 해안가에 의지하여 활약했는데, 1909년 4월 20일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부안 상서면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교전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의병대를 해산시켰다. 이어서 박도경은 방장산(方丈山)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결국 은신처가 노출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같은 해 12월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박도경은 왜놈의 손에 죽는 것보다 자결하는 것이 옳다고 결심하고 1910년 2월 8일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박도경의 사후 대구의 아전들이 돈을 추렴하여 초상을 치렀는데, 이때 대구의 약령시(藥令市)에 모인 상인들이 수백 냥을 모아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수 있도록 도왔고, 영남의 선비들이 제전(祭奠)을 올려 주었다.
[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