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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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華仲 |
영어음역 | Son Hwajung |
이칭/별칭 | 정식(正植),화중(華仲),화중(和中),화중(化中),초산(楚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대접주이자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이름은 정식(正植), 자는 화중(華仲)[또는 和中·化中), 호는 초산(楚山)이다. 1861년 정읍현 남일면 과교리[현 전라북도 정읍시 과교동]에서 아버지 손호열(孫浩烈)과 어머니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겨 안전하게 보존했던 전라북도 태인 출신 손홍록(孫弘祿)의 후예이다.
[활동사항]
손화중은 비교적 유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이웃 마을인 음성리[현 정읍시 상평동]로 이사하여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훌륭할 뿐 아니라 매우 총명하여 주위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12세 때 고흥유씨(高興柳氏)와 혼인하여 손병두·손성선·손성태[일명 손응수]·손성한 등의 자식을 두었다.
손화중은 20대에 처남 유용수(柳龍洙)[1863~1895]를 따라서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당시 경상도를 비롯해 지리산 일대에 널리 전파되고 있던 동학에 입교(入敎)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학에 입교한 지 약 2년 뒤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을 중심으로 포덕(布德)을 시작하였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시작된 손화중의 포덕 활동은 정읍 농소리[현 정읍시 농소동], 입암면 신면리, 음성리 본가를 거친 뒤, 이윽고 무장현를 근거지로 삼으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무장현을 무대로 한 포덕은 당초 읍내 김모의 집을 포접소로 삼아 전개되었고, 얼마 후 무장면 덕림리 양실마을[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윗양실마을]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또 동음치면(冬音峙面)[현 공음면] 두암리 사기동에도 근거지를 두었다고 한다.
이후 손화중은 동학 농민 혁명이 시작되자 양실마을의 이웃인 괴치리 최부자집[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276-1번지]으로 도소를 옮겼다. 그런데 손화중 포의 동학 농민군이 필요한 물자 공급 및 활동적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최부자집에 도소를 설치했다는 것은 구술일 뿐, 현재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농민 전쟁이 잉태되고 있을 무렵 무장과 고창을 비롯하여 이웃 고을에서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손화중의 명성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구술에 의하면, 손화중은 당시 허리에 16개나 되는 염랑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손화중의 사회적 기대와 명망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손화중이 이러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최시형(崔時亨)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손화중은 1891년 3월에 공주 신평[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신평마을]에 은거하고 있던 최시형을 찾아가 처음으로 지도를 받은 이래, 최시형이 1891년 5월부터 7월까지 2개월에 걸쳐 전라도 익산·부안·고부·태인·금구·전주를 순회하며 포덕을 할 때도 만나서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은 뒤 손화중의 포덕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민심도 점점 손화중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민심은 미륵불 출세(出世)나 정도령 같은 진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1892년 8월 이른바 손화중 포 관내에서 선운사 마애불비기 탈취사건(禪雲寺磨崖佛秘記奪取事件)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전라도 일대에서 날로 그 명망이 높아 가고 있던 손화중의 인물 됨됨이와 손화중 포의 조직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면서 손화중을 더욱더 신비의 인물로 추앙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2년 전라북도 삼례에서 교조 신원 운동이 일어나자 손화중은 많은 동학 교도들을 동원하여 여기에 참여하게 하였다. 또한 재인들로만 구성된 특별한 포를 만드는 등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삼례 집회 해산 후 동학 교도들이 무장군수에게 뺏긴 지목전 1,000냥을 회수하는 등 강력한 동학 조직의 힘을 보여 주었다. 1893년 서울 광화문에서 복합 상소가 이루어질 때는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충청북도 보은에서 열린 장내리 집회에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등 동학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1월 10일에 1,000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약 두 달여에 걸쳐 고부 농민봉기를 주도했던 전봉준(全琫準)이, 고부 봉기를 진압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을 피해 3월 13일경 손화중의 근거지인 무장으로 피신하였다. 손화중은 처음에 전봉준의 전면 봉기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나 전봉준의 끈질긴 설득으로 동학 농민 혁명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손화중의 도소는 괴치[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양실마을]에 있었는데, 전봉준은 괴치로부터 멀지 않은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현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마을]을 근거지로 삼아 손화중과 잦은 회동을 갖고 훈련을 하는 등 3월 16일경부터 전면 봉기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3월 20일 전봉준이 「무장 포고문」을 선포하면서, 3월 21일 호남 일대의 각 고을 농민들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1993년까지는 정읍 고부 또는 부안 백산을 전국적인 농민 전쟁의 출발점으로 생각했는데, 이는 오지영의 『동학사』에 나오는 ‘호남창의대장소’가 백산에 있었고, 백산에서 호남 각 고을의 농민군들이 모여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고 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그 후 무장 봉기설이 제기되었으며, ‘백산대회’의 구체적인 실상을 알려 주는 자료가 거의 없어 무장 기포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장 기포 과정에서 손화중의 역할을 알려 주는 자료는 오지영이 쓴 『동학사』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1894년 3월 25일 부안의 백산성에서 개최된 동학 농민군의 ‘백산대회’에 약 8천여 명의 동학 농민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절반에 가까운 3,500명이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이었다고 한다. 이는 손화중의 포덕 활동이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전개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현지 조사에 의하면, 용수마을에는 접장의 모의 장소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으며, 동학 농민 전쟁 당시 희생당한 후손들이 다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직간접으로 손화중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곧 손화중은 명망과 포덕 활동으로 전라도 최대의 조직을 갖게 될 만큼 일대 조직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4년 3월의 제1차 동학 농민 혁명에서 손화중은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총관령을 맡았으며, 전주화약(全州和約)에 이어 전라도 각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이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수행해 나갈 때는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서남부 일대를 통솔했다. 당시 손화중은 34세로 전봉준보다 6세 연하였고, 김개남[42세], 김덕명(金德明)[50세], 최경선(崔景善)[36세] 등 다른 대접주와 비교할 때도 최연소자였다.
가을 봉기 이후 손화중은 일본군이 남해안 쪽으로 상륙해 올 것에 대비해 북상하는 농민군에 합류하지 않고 최경선과 같이 전라남도 나주와 광주 지역을 지켰다. 남접·북접 연합 농민군이 공주 공방전에서 패배한 뒤, 그는 나주를 포위하고 수차례 점거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관군·일본군·민보군 연합 세력에 의해 농민군이 각처에서 패배 당해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그는 1894년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하였다. 당시 손화중의 활동과 세력에 대하여 농민군 진압의 선봉장이었던 이규태는 그의 묘비명에, 손화중이 전봉준·김개남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진 ‘거괴’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농민군을 해산한 손화중은 1895년 1월 6일 전라북도 흥덕의 수강산 산당 이씨 재실에서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손화중은 재실지기에게 그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을 고발하여 상금을 받으라는 권유를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895년 3월 손화중은 전봉준·김덕명·최경선·성두환(成斗煥)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판결문에 의하면, 전라도 고부관아로 들어와 군기를 탈취하고, 전라감영군을 항적(抗敵)하고, 초토사 홍재의가 거느린 관병에 항적한 죄명이 명시되어 있어 무장 기포 시의 활동이 주된 죄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특히 3월 봉기 이후 활약이 컸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처형된 손화중의 시신은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동학 가담자에 대한 정부의 처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줌과 동시에, 실패한 혁명가의 뒷모습을 보여 주는 일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