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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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伯賢 |
영어음역 | Jeong Baekhyeon |
이칭/별칭 | 근영(根永),진암(眞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문병학 |
성격 |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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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
성별 | 남 |
생년 | 1869년 |
몰년 | 1920년 |
본관 | 진주 |
[정의]
개항기 고창 출신의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휘는 근영(根永), 호는 진암(眞庵)이다. 백현(伯賢)은 자이다. 1869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에서 태어났다. 정백현은 농민 봉기 와중에 잡히지 않은 몇 안 되는 지도자급 인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활동사항]
정백현은 1894년 3월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 때, 전봉준(全琫準)의 처 칠촌으로 뒷날 전주대도소 도집강(都執綱)으로 활약했던 송희옥(宋喜玉)과 함께 전봉준의 비서가 되었다. 이후 정백현은 사발통문(沙鉢通文)과 창의문(倡義文), 사대명의 등 농민군의 주요 격문을 작성하였다. 이렇듯 정백현은 동학 농민 혁명 봉기 과정에서 격문, 통문, 행동 규약,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등을 작성하여 진중에는 물론 전국에 띄운 문필가이다. 전봉준은 간혹 자신이 직접 쓰기도 했지만 대서한 경우도 많았는데, 그 일 역시 정백현이 도맡아 하였다.
정백현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에 대한 사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정백현의 아들 정병묵(鄭秉默)의 증언에 의하면, 정백현은 동학 농민 혁명이 끝난 뒤 몸을 피해 신촌마을로 피신했다가 서울로 이주했다. 이후 정백현은 이전에 교류하던 판서 신헌구, 참판 이근용, 이중하 등과 연결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연좌법에 의해 정백현의 아버지는 고부 수성군에게 잡혀 고문을 받다가 생을 마감했다. 정백현은 1903년경 고향으로 돌아온 뒤 1920년에 죽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 『진암견문록(眞庵見聞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