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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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憲 |
영어음역 | Jongheon |
이칭/별칭 | 만암(曼庵),목양산인(牧羊山人)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배옥영 |
성격 | 승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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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
성별 | 남 |
생년 | 1876년 1월 17일 |
몰년 | 1957년 1월 22일 |
본관 | 여산 |
[정의]
근대와 현대 고창 출신의 승려.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성은 송씨(宋氏)이다. 호는 만암(曼庵)이며, 목양산인(牧羊山人)이라고도 한다. 1876년 1월 17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의환(宋義煥)이다.
[활동사항]
종헌(宗憲)은 4세 때 아버지를 잃고, 11세 때에는 어머니를 잃었다. 이에 1886년(고종 23) 백양사의 취운선사(翠雲禪師) 문하로 출가하였으며, 탄영(坦泳)에게 교학을 수학하였다. 16세에 구암사 전문 강원에 입학하여 정호(鼎鎬)에게 수학하고, 다시 운문암의 환응(幻應)에게 수학하여 불교 경전을 익혔다. 1905년(고종 42) 이후에는 청류암(靑流庵)·백련암(白蓮庵)·천진암(天眞庵)·해인사 강원 등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특히 해인사에서 특강을 할 때는 전국에서 종헌의 명성을 듣고 몰려든 학인(學人)이 상당한 수에 달했다고 한다
1914년 종헌은 출가 도량인 백양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이후 청류암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설립하고 종래의 강원제도를 혁신한 불교 교육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일반인들을 위해 심상학교를 세웠다. 이때의 광성의숙을 통한 교육은 당시 불교계 상황 속에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약 100여 명의 학인들이 모여 선(禪)·교(敎)·율(律) 등을 공부하며 외전(外典)에 대한 교육도 병행하였다. 특히 학인들의 교육을 위해 출간했던 역사·지리 관계 교재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일제의 심한 감시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백양사를 출입하였다는 사실도 종헌의 이 같은 사상과 연계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비구와 대처 문제로 논란이 많았는데, 종헌은 사원 생활에서 처음으로 비구와 대처를 구분해서 법당에 정법중(正法衆)[비구]과 호법중(護法衆)[대처]이라는 표찰을 써 놓고, 각각 구별해서 앉도록 했다.
종헌은 1917년부터 10년에 걸친 백양사 중창 불사에 착수하였다. 그가 처음 백양사의 주지로 취임했을 때는 수칸의 요사채밖에 없는 황폐한 사찰이었다. 이때 그는 학승과 수좌들을 지도하면서 철두철미한 자급자족 정신을 제창하였다. 젊은 승려들에게 양봉 기술을 익히게 하고 각종 필수품을 제조, 판매하여 생활을 돕게 하였으며, 사찰 토지를 승려들이 직접 경작하게 하였다. 특히, 반선반농제도(半禪半農制度)를 확립하여 선가(禪家)의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의 가풍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또한 이와 같이 하여 얻은 수입은 절대로 사사로이 쓰지 못하게 하고 사중(寺中) 재산으로 취합하게 한 결과, 처음 40석의 추수에 불과하였던 백양사 재산을 약 800석까지 올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종헌은 1925년에 임제종(臨濟宗) 설립을 주도하였고, 그 후 1928년부터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전신] 설립을 주도하여 초대 교장직을 역임하였다. 1947년에는 전라남도 광주에 정광중학교를 설립하여 7년간 교장직을 역임하면서, 한편으론 호남고불총림(湖南古佛叢林)을 결성하여 불교 정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실질적인 대한불교 조계종 정화 불사(佛事)의 효시를 이루게 되었다.
종헌은 1952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5년 동안 재직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대다수의 승려들이 처를 거느리게 되어 승적(僧籍)을 교적(敎籍)으로 고쳤던 것을 다시 승적부(僧籍簿)로 고쳐 출가승 본위의 종단 출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삼보 사찰(三寶寺刹)을 비롯한 전국의 중요 사찰을 비구승에게 돌려 줄 것을 강조하였고, 대처승에게는 본사의 주지는 물론 삼직(三職) 등도 맡기지 말도록 하였다. 또한, 태고보우(太古普愚)를 한국 불교의 종조(宗祖)라 역설하여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종조로 내세우는 주장에 반대하였다.
1954년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에서 종정(宗正)으로 임명된 뒤 비구 승단을 이끌며 대처 승단과의 타협을 시도하던 중, 비구 승단 내의 강경파와 마찰이 생기자 정화 운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선언을 하고 백양사로 내려왔다. 이후 후학을 기르는 데 힘을 쏟다가 1957년 1월 22일[음력 12월 22일] 세속 나이 82세, 법랍 71년으로 입적했다. 다비 후 사리 8과가 나와 제주와 백양사에 봉안했다. 제자로 서옹(西翁)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백양사 경내에 탑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