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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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郊村里校村堂山 |
영어음역 | Gyochon-ri Gyochon Dangsan |
영어의미역 | Shrine-Mountain of Gyochon Village in Gyochon-ri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민간 신앙 유적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송화섭 |
성격 | 당산 선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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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조선시대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에 있는 조선 시대 당산 선돌.
[개설]
고창 지역에는 마을 공간에 당산나무나 당산 선돌을 세워놓고 당산제를 지내는 관행이 있다. 당산은 조선 후기 자연 마을에 조성되는 경향이 있다. 교촌리에도 조선 시대에 당산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교촌리는 원래 지명이 생교, 행교로 불렸다. 이러한 지명은 교촌리에 고창향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1914년에 교촌리는 일부가 분리되어 교흥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위치]
교촌리 교촌 당산은 원래 고창향교 옆에 있었던 것인데, 아들 당산은 향교 서편에, 할아버지 당산은 고창중학교 북쪽에 위치한다. 할머니 당산은 고창고등학교 남쪽에 위치한다.
[형태]
자연 선돌 2기와 1기의 당산나무가 있었다. 당산 할머니는 1그루의 팽나무이며, 당산 할아버지는 선돌이었으나 1990년대 초에 트럭이 들이받아 두 동강이 나는 바람에 새로운 당산 선돌을 세워놓았다. 마을 입구 당산 선돌을 정비하였는데, 아들 당산은 높이 60㎝의 선돌이며, 할아버지 당산은 높이 92㎝의 선돌이다.
[의례]
정월 초사흗날 밤에 당산제를 지낸다. 교촌리 주민들은 섣달 그믐경에 마을회의를 열어 당산제를 주관할 제관과 화주를 선출한다. 제관과 화주가 생기복덕이 있는 주민 가운데 선출되면 제관집과 화주집에 황토흙을 뿌리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부정 타지 않도록 한다. 제관은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맡으며, 화주는 제물을 만든다. 정월 초이튿날에 장보기를 한 후 화주집에서 부부가 제물을 준비한다.
제물 준비는 부정이 타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부부간에도 서로 말을 하지 않으며, 새벽에 목욕재계를 하고서 제물 음식을 장만하였다. 제물은 삼실과, 시루떡, 나물, 생선을 사용하며, 제비는 마을 농악대가 걸립굿을 해서 마련한다. 초사흗날 밤 자정 무렵이 이르면 제관과 화주는 마을 입구에 위치한 할아버지당산에 가서 제사를 거행한다. 당산제는 설찬~분향~강신~독축~음복 순으로 간소하게 지낸다.
[현황]
당산 선돌은 마을 풍수가 완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선돌을 세워 풍수지리적인 마을 공간을 설정하는 마을의 경계석이기도 하고, 마을의 수호신석이기도 하다. 그런데 십여 년 전에 교촌리 교촌 당산에 진북화표라는 화표석주를 세워놓았다. 진북화표는 교촌리 교촌 당산이 고창 오거리 당산에 포함된다는 판단에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교촌리에는 원래 진북화표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고창 오거리 당산은 1803년에 고창읍 삼거리, 즉 세 곳에 세워진 것인데, 오거리가 다섯 곳의 마을 당산을 대상으로 한다는 인식과 판단에서 천북동 동산몰 당산과 교촌리 교촌 당산을 끌어들여 고창 오거리 당산으로 변모하였다.
[의의와 평가]
교촌리 교촌 당산은 자연 마을의 당산과 당산제였는데, 고창 오거리 당산제를 지내면서 자연 마을 당산이 고창 오거리 당산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오거리라는 명칭은 5개 마을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고창읍의 번화한 거리를 지칭한다. 오거리를 삼거리와 동일시하는 곳도 많다. 따라서 교촌리는 처음에 고창 오거리 당산에 편입되지 않았으나 후대에 고창 오거리 당산제에 편입시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