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B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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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청우 |
[마을의 유일한 통로였던 질마재]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은 질마재를 문(門)으로 삼아 한 집처럼 모여 살아온 마을이다. 질마재를 문으로 삼았다는 말은, 옛날에는 질마재가 외부에서 진마마을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란다. 이 고개에서 바라다볼 때 서쪽으로 변산반도(邊山半島)를 휘감아 도는 서해가 있고, 그 앞에 드문드문 마을이 서 있는데, 말하자면 앞으로는 하나뿐인 고갯길이, 뒤로는 까마득히 푸른 바다가 있어 한 마디로 ‘고립된’ 마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을의 지리적 특성은 마을 사람들의 물질적ㆍ정신적 유대감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마을에는 외부의 출입이 잦지 않은 터라 도둑이 없었고, 이웃의 일은 곧 내 일이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러한 마을 분위기가 서정주 시인에게는 평화로운 이상향으로 다가왔고, 유려한 시들을 창작하게 된 배경이 되었을 터였다.
고향 질마재에 대한 서정주 시인의 기억 역시 정읍역에서 흥덕을 거쳐 장터, 그리고 질마재라는 고개까지 이르는 길로 시작한다. 그의 산문집 『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에는 “호남선 정읍역에서 고창으로 가는 신작로를 사십 리를 가면 흥덕(興德)이라는 연못 하나가 너무 큰 채경처럼 두드러진 옛 현청 소재지가 있고, 거기서 남으로 다시 십 리를 가면 알뫼[卵山]-닷새마다 서는 우시장이 제일 커서 ‘쇠점거리’라고도 부르는 조그만 장터. 거기서 다시 먼 십 리의 산골을 서해 쪽으로 더듬어 오르면 질마재라는 영모롱이 위에 선다.”고 묘사되어 있다.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 질마재]
질마재는 크고 험한 고개는 아니지만, 시인의 아버지가 밤길에 넘어오다 “호랑이한테 모래 벼락도 맞았다”는 일화도 있을 만큼 이야기로 얽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저마다 고갯길에 대한 전설 혹은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의 힘으로 자신의 이력을, 그리고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기에 진마마을은 그저 작은 시골 마을에 그치지 않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질마재에 얽힌 전설 중에는 특히 호랑이와 도깨비에 관련된 이야기가 눈에 띈다. 예부터 호랑이는 무서운 존재인 동시에 신성하고 영험한 동물이었다. 질마재에 얽혀 전해지는 호랑이와 관련된 전설도 크게는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두운 밤, 마을의 바깥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이었던 질마재 고갯길을 넘을 적에 두려움에 떨었던 마을 사람들 앞에, 때론 산신령이나 도깨비가 나타나 길을 밝혀 주었다고 전해 오는 신령한 장소가 바로 이곳 질마재였던 것이다. 또 어느 날은 도깨비가 나타나 지나가는 행인에게 씨름을 청해 왔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전해 오는 곳이 바로 이 질마재이다. 도깨비와의 씨름에서 이기려면 도깨비가 몸에 지니고 있는 굵은 빗자루를 잡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밤새 도깨비와 씨름하며 시달리기만 하다 힘만 쓰고 지쳐서 쓰러져 버린다는 이야기도 뒤따라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마을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질마재라는 고개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질마재는 마을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였기에 정화(淨化)의 의미를 실현하는 영험한 존재들이 출몰하는 신령한 장소로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이외에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우리네 과거를 말해 주는 것들로 마치 빛이 바래고 꾸깃꾸깃한 헌 종이 속에 실려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질마재 이야기들]
진마마을 사람들에겐 질마재와 관련해서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언젠가 신작로 건설이 한창일 무렵, 다른 곳에는 자주 다니던 차들이 질마재에는 전혀 다니지 않아 발품을 팔아 고개를 넘어 다녔노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부터, 마찬가지로 교통수단이 변변치 않아서 연지와 곤지를 찍고 진마마을로 시집올 적에도 가마꾼이 맨 가마를 타고 뒤뚱거리며 고개를 겨우 넘어와서, 그때부터 뒤뚱거리는 시집살이가 시작된 것 같다고 허탈하게 웃는 할머니의 이야기도 있다. 부안에서 열리는 5일장에 맞추려고 무거운 등짐을 지고 질마재를 넘어 한참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나이 든 사람이면 누구랄 것도 없이 겪었음직한 이야기다. 이렇듯 질마재 위의 많은 이야기들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아스팔트로 반듯하게 포장이 된 질마재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옛날 마을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말의 의미는 새삼 무색해진다. 더 이상 신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도, 마을 사람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 그저 그런 평범한 고갯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질마재의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해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 질마재가 그저 마을 앞에 놓여 있는 단순한 고갯길이 아니다. 마음 안에 담겨 있고 말과 말 사이에 얽혀 있는 이야기들의 거대한 뿌리와도 같다. 질마재는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서정주 시인의 시 속에, 그리고 그것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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