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C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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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임선화 |
무장기포는 1894년 3월 15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되었다. 당시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는 수천 명의 동학 농민군이 모였는데, 이들은 죽창을 만들고 무기와 식량을 확보한 뒤 대오를 정비하였다. 준비를 마친 이들은 마침내 3월 20일 이곳에서 창의문을 낭독하고 기포하였다.
무장기포 직전 무장현 일대는 동학의 교세가 대단히 컸다. 동학의 교세는 전라도 동학 대접주인 손화중[1861~1895]의 행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손화중은 무장현 성송면 괴치리 사천마을과 양실마을, 동음치면 두암리 사기동 등 여러 곳에 근거지를 두고서 교세를 확대해 나갔다. 특히 선운사 도솔암마애불의 비기를 손화중이 얻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새 세상을 바라는 민중들의 염원과 맞아떨어져 교세는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무장현 일대에서 손화중을 중심으로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고 있을 때,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는 고부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전봉준은 고부 농민 봉기 이전부터 인근 지역의 호응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1893년 12월 무장 지역의 동학 지도자를 만나러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의 송문수 집으로 왔으며, 이곳에서 손화중ㆍ정백현ㆍ김성칠 등과 함께 전라감사 김문현의 폭악한 정치에 저항하는 군사를 일으키는 계획을 논의했지만, 시기상조라는 손화중의 반대로 합의에는 실패하였다.
또한 고부 농민 봉기 직후인 1894년 2월 19일에도 당산리 인근 신촌리의 김성칠의 집에서 이전 4명의 무장 지역의 동학 지도자 외에 김개남ㆍ서인주ㆍ임천서ㆍ김덕명ㆍ강경중ㆍ김영원ㆍ고영숙ㆍ최재형 등 각 읍의 동학 접주들이 모여 농민 봉기 확대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로써 고부 농민 봉기와 무장기포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봉준이 고부의 농민군을 해산한 3월 3일을 전후하여 고부 이외의 지역에서 농민 봉기에 가담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월 11~12일에 동학 농민군 약 3000여 명이 금구에서 태인을 거쳐 부안으로 이동했다는 것, 3월 12일 금산의 동학 농민군 수천 명이 읍내에서 봉기하였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전봉준은 소수 측근과 함께 3월 13일 무장의 손화중을 방문하였다. 전봉준은 손화중에게 농민 봉기 확대를 호소하였다.
손화중도 이제는 더 이상 농민 봉기를 피할 수만은 없었다. 고부에서 동학교도에 대하여 보복이 자행되고 있었고, 2월 19일의 격문 이후 여러 지역에서 농민 봉기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과 피 끓는 농민들의 움직임에 손화중도 농민 봉기를 결정하였다. 그 과정에서 무장기포가 준비된 것이다.
현재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는 기념지로 정비가 되어 있지만, 동학 농민군이 훈련했던 장소에는 인가가 있다. 조용한 마을에 이처럼 많은 농민군이 들어와 있는데, 이를 지방관들이 눈치 채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송문수는 훈련장에 난장을 열었고, 난장에 들어와 있는 외지인들 속에 농민군을 숨겼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