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C03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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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이장 최대기 씨는 2009년 2월 9일에 모친상을 당했다. 당시 최대기 씨 어머니는 백수[100세]에서 딱 한 살 모자란 아흔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생전에 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해 모신 공으로 최대기 씨는 2007년 5월 9일 대한노인회로부터 효자상을 받았다.
어머니는 고창 고을 원님의 ‘딸의 딸’로 태어났다고 한다. 정식 학교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늘 뼈대 있는 가문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고, 그에 걸맞은 행실로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사신 분이라고 한다. 그런 어머니는 평소에도 매우 다정다감한 분인지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외로움을 느끼실까 봐, 최대기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부터 어머니와 함께 한 방에서 잤단다.
“[어머니하고] 꼭 같이 잤제. 한 방에서 어머니허고 나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피차간에 우리 어머니허고 나허고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너허고 나허고는 뭣이 맞는게비야’ 꼭 그렇게 허고…….”
어머니가 작고한 날까지 한 방에서 지내면서, 늘 어머니가 무엇이 불편한지를 살펴 신경을 쓰는 최대기 씨를, 마을 사람들은 물론 고창군에서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지극한 효성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최대기 씨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 보면, 어머니에 대한 효성 이면에 지난 날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회한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임종을 못 본 게 한이야]
“그 전날로는 약이 좀, 별로 없잖에요. 내가 우리 아부지, 그렇게 병환에 드신 줄도 모르고. 내가 그때가 또 군대 가서 종신을[임종을] 못 했어요. 왜 못했냐 허므는, 그때 눈이 엄청 와 가지고. 내가 군대에, 의무대 있으면서 유격장 파견을 나갔거든요. 그러니까 눈이 엄청 와브니, 사람이고 뭣이고 오도가도 못 헌디. 거그만 온 것이 아니라, 여그도 그렇게 와 갖고. 통화, 통보가 안 돼야 갖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묘소도 다 쓰고 그러고 난 뒤에사 와가지고 억울해서 나, 손가락을 지금, 여그 테가 나 있습니다마는 손가락을 갈라 가지고, 아, 나라에 부름 받아서 아버님의 운명하심을 못 봐서 대단히 죄송하다고, 내 혈서를 써서 아버님 묘, 묘소에 가서 사죄를 헌 적도 있고 그래요.”
돌아가신 아버지 묘 앞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갈라 혈서를 써서 사죄까지 했다는 최대기 씨.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비로소 효자가 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효자였던 것이다.
“아니, 그 병원에 계실 때도 돌아가실 때까지 나보고 옆에가 있으라 헌디. 참 정을 띠어야 쓰겄는디, 돌아가실 때 된게 정을 쪼까 띠어야 쓰것는디. 아, 그 병원에서 날 새고 있을 수도 없고. 그때가 조끔 거시기 헙디다. 돌아가실 때 갑작시럽게, 그냥, 한 달쯤 볶이다 돌아가셨어도 그냥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 같어.”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와의 정을 떼지 못해 안타까웠다는 최대기 씨는 자신이 효자상을 받은 것이 부끄럽다고 말한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안부를 걱정하고 끼니를 챙겨 주고자 했던 어머니가 오히려 자신을 돌봐 준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최대기 씨는 구수마을 토박이로, 경주최씨 11대조 할아버지가 구수마을 입향조라고 한다. 2009년 초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두 내외만이 남아서 고향집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3남 3녀의 자녀들이 모두 잘 자라 주어 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최대기 씨 집안은 대대로 효자가 난 이름난 가문이었다. 효자 집안에 효자 난다고, 그것을 증명하듯 마을 위쪽 주유소 옆에는 최대기 씨 집안의 삼효각이 번듯하게 서 있다. 경주최씨 삼효각 앞에 서서 기둥을 쓸어 만지는 그의 손길과 눈빛에 집안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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