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445
한자 瓦村面博沙里良民虐殺事件
영어공식명칭 Incident of Civil Massacre by Reds Partisan in Baksa-Ri, Wachon-Myeon of Gyeongsan Count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49년 10월 15일연표보기 - 군경의 팔공산 빨치산 토벌작전 개시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9년 11월 29일연표보기 - 와촌면 박사리 양민학살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49년 11월 29일연표보기 - 와촌면 박사리 양민학살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 지도보기
성격 사건

[정의]

1949년 11월 적색 빨치산이 저지른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 주민 학살사건.

[개설]

1949년 10월 중순부터 군경은 경산군 와촌면 동강리[지금의 경산시 와촌면 동강리] 주민의 신고를 바탕으로 대구 인근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토벌작전으로 큰 피해를 본 ‘야산대(野山隊)’, 즉 적색 빨치산 대원들은 신고 주민의 거주지로 오인한 와촌면 박사리(博沙里)를 보복차 11월 29일 밤에 습격하여, 주민 38명을 참살하고 16명에게 중상을 입힌 후 도주하였다.

[역사적 배경]

8·15 광복 후 미군정이 시행되고 있던 남한에서 1946년초에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좌우대립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통일정부 수립 문제를 다루던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결렬되어버린 정세 속에서 조선공산당 중심의 극좌파는 1946년 가을부터 미군정에 총공세를 펴기 시작하였고,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대구 10·1사건의 여진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때부터 군경의 추적과 압박으로 수세에 몰린 좌익세력 일부는 인근 지역의 산속으로 들어가 무장항쟁을 꾀하여 적색 빨치산[Reds Partisan]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흔히 ‘야산대’로 불렸다.

대구와 인접해 있는 팔공산도 산세가 그다지 험하지 않고 지형상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든 진출입이 가능하여 야산대의 한 근거지가 되어갔다.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1월 2일, 대구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제6연대 병사 중 100여 명이 전라남도 여수(麗水)·순천(順天)에서의 11연대 군사반란에 호응하여 총기를 갖고 부대를 이탈했다. 그 중 90명은 다음날 경상북도 김천(金泉)에서 체포되었으나, 나머지 10여 명은 경산군 하양(河陽)을 거쳐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12월 6일과 이듬해 1월 30일에도 6연대 일부 병사들의 반란행동이 재차 발생하였고 그들 역시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경과]

1949년 10월 초순의 어느날, 팔공산에 땔감을 구하러 들어간 경산군 와촌면 동강리 주민 도달권(都達權)이 양시골[양성곡(兩城谷)]에서 숨어지내는 야산대 대원들에게 붙잡혔다. 경찰이 보낸 정탐꾼이라는 의심을 받고 심하게 문초 당한 도달권은 후환을 걱정하여 이웃마을 박사리의 주민인 것처럼 거짓으로 말하였다. 그 후 간신히 탈출하여 귀가한 도달권은 산에서 있었던 일을 와촌지서로 가서 신고하였다. 이에 대대적인 수색·토벌작전이 10월 15일에 개시되어, 야산대 78명 사살과 7명 생포라는 전과를 군경이 올렸다. 다만 2명의 야산대원이 피신 도주에 성공했는데, 아마도 그들은 청도군 운문산(雲門山)에 진치고 있는 ‘인민유격대 제3병단’ 계통의 남도부(南道富)의 부대로 가서 보고했을 것이며, 그로부터 보복극이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11월 29일 밤 9시경에 팔공산 동쪽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60여 명의 야산대원들[그 중 9명이 무장]이 3개조로 나뉘어 박사리를 습격하였다. 골목마다 들이닥친 그들은 중요 연설이 있다면서 마을 청·장년 전원을 나오게 해 가을걷이 끝난 논으로 집결시키고는 집집마다 불을 질러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그리고는 울부짖으며 항의하는 주민들의 목과 복부 등을 죽창·철창·장검 등으로 찌르고, 총도 쏘아 무참히 학살하였다.

[결과]

2시간 반 동안 계속된 학살극으로 박사리의 초가 108채가 잿더미로 변하고 주민 38명이 참살 당했으며 16명이 전신 난자, 손목 절단 등에 의한 중상을 입었다. 야산대가 물러간 후 생존주민의 신고를 받은 와촌지서와 인근 하양지서의 경찰, 그리고 영천(永川)에 주둔 중인 군 병력이 출동하여 추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로 빨치산 대원 20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와촌면 박사리 양민학살사건은 외세에 의해 강제된 민족분단의 파생물로 좌우격돌의 정세가 조성되어버린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군 및 경찰과 적색 빨치산과의 공방전이 계속되던 가운데 무고한 지역주민들이 큰 희생을 치른 참극의 한 사례였다. 1985년 11월 29일 와촌면 박사리 양민학살사건의 비극을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박사리 현지에 추모공원이 조성되고 위령비가 세워졌다. 또한 매년 10월 30일 박사리 현장에서 한국자유총연맹 경산시지회 주최의 ‘자유수호희생자 합동위령제’가 거행되어 2020년 현재 40회에 이르고 있다.

한편, 박사리 출신의 문인 박기옥이 희생자의 유족들을 두루 면접하고 작성한 르포의 일부를 2016년의 ‘매일신문(每日新聞) 시니어문학상’에 응모하여 논픽션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원고 전부를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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