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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희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750
한자 車喜植
이칭/별칭 차봉습(車鳳習),차봉습(車奉習)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혜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 12월 17일연표보기 - 차희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차희식 장안면·우정면 독립만세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2월 9일 - 차희식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27년 2월 24일 - 차희식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1년 3월 9일로 감형
몰년 시기/일시 1938년 11월 8일연표보기 - 차희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차희식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주곡리[현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 81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우정면 일대의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차희식(車喜植)[1884~1938]은 1884년 12월 17일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주곡리[현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 81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차봉습(車鳳習), 혹은 차봉습(車奉習)이라고도 불렸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차희식석포리의 구장이었던 차병한(車炳漢), 차병혁(車炳赫)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3일 차희식(車喜植)·장제덕(張濟德)·장소진(張韶鎭) 등은 '오늘 면 내에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칠 것이니, 나와서 참가해야 한다.'라며 마을 사람들을 이끌었다. 군중과 함께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이어서 화수리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 안에 있던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권총을 쏘며 도망치자, 차희식·장소진·장제덕·정서송(鄭庶松)·이영쇠(李永釗) 등과 가와바타 도요타로를 처단하기로 하고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로 구타하여 처단하였다. 이에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 살인, 방화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4년의 은사(恩赦)와 1927년의 칙령 제11호 대사령(大赦令)으로 1927년 2월 24일 징역 11년 3월 9일로 감형되었고, 수감된 지 9년 2개월 만에 특사로 출옥하였다. 1938년 11월 8일에 사망하였다.

[묘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장안면·우정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공적이 확인되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김현묵 등 27인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0. 12. 9.)
  • 「차희식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7. 2. 24.)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0(국사편찬위원회, 1994)
  •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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