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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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水文 |
영어공식명칭 | Park Soomo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상범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7월 7일 - 박수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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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박수문 이리 장날 만세 시위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5일 - 박수문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4월 2일 - 박수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5년 - 박수문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출생지 | 화배리 - 전라북도 익산시 용동면 화배리 |
활동지 |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수문(朴水文)[1897~1937]은 1897년 7월 7일 지금의 익산시 용동면 화배리에서 태어났다. 서울 유학 중 3.1운동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문용기(文容基)·박도현(朴道玄)·서정만(徐廷萬)·장경춘(張京春) 등의 주도로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에 열린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기독교인과 학생 등 200여 명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장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1,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중으로 불어났다.
1919년 4월 4일 시위에서는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문용기·박도현·서정만·장경춘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박수문은 1919년 4월 8일 길귀동(吉貴童)과 함께 산 위에서 다시 만세 시위를 벌이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1919년 4월 25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7년 4월 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5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수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