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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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知泳 |
영어공식명칭 | Oh Jiyoung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 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상범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종교인.
[활동 사항]
오지영(吳知泳)[1868~1950]은 1868년 고창군 무장면 덕림리에서 태어났다. 1891년 3월 12일 형인 오시영(吳時泳)과 오사영(吳泀泳)의 뒤를 이어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3년 11월 14일 일어난 익산농민항쟁의 우두머리로 활약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대접주(大接主) 김방서(金邦瑞) 휘하의 중견 간부로 활약하였다. 최시형(崔時亨)을 중심으로 하는 북접이 종교적인 이유로 전봉준(全琫準)·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仲)을 중심으로 한 남접과 대립하며 무력 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리는 상황에서 오지영은 조정에 나서 항일 구국 투쟁이라는 대의로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오지영은 잠시 한양으로 피신해 은거하였다.
1905년 일본 망명 후 귀국한 손병희(孫秉熙)가 지방분권과 중의제(衆議制)를 통해 교단 조직을 혁신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한 뒤 포교 활동을 시작할 때 오지영은 익산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천도교의 문명개화 정책에 따라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다가 1911년에는 경성에서 천도교 중앙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0년 초 오지영은 최동희(崔東曦)와 함께 천도교의 혁신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22년 손병희 사망 이후 천도교 보수파의 반대로 천도교 내부 개혁에 실패하자 최동희와 함께 교단을 나와 독자적인 천도교연합회[일명 혁신파]를 결성하였다. 1926년 4월 5일 천도교연합회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 조직 정의부와 함께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설립하였고, 1926년 3월 고려혁명당의 방침에 따라 오지영은 200여 명의 천도교연합회 농민들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해 집단농장을 설립하였다. 이후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주요 간부 15명이 구속되고 1927년 최동희가 사망하여 농업 경영에 큰 타격을 입게 되자 1936년 10월 귀국하였다.
1940년 오지영은 천도교 교단 재통합 과정에 참여하였지만 당시 통합을 주도한 신파의 주류에 속하지는 못하였다. 1950년 사망하였다.
[사상과 저술]
오지영의 저서로는 동학 및 천도교 역사에 관한 생생한 경험을 담아 1940년에 간행한 『동학사(東學史)』가 있다. 『동학사』에는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12개 조가 담겨 있어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