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1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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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柳里-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
집필자 | 김선아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 「삼유리 버들뫼」, 『내 고장 전설집』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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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버들뫼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
관련 지명 | 사유정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
관련 지명 | 유리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
관련 지명 | 구월산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
관련 지명 | 버드산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
성격 | 설화|동물 보은담|지명 유래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유 선비|호랑이|유정현 |
모티프 유형 | 호랑이의 목에 걸린 비녀를 뽑아 준 선비|명당자리로 은혜 갚은 호랑이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에서 버들뫼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삼유리 버들뫼」는 귀양으로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려던 유 선비가 결국 끝까지 과거를 볼 기회는 얻지 못하지만 구월산에서 만난 호랑이의 목에 걸린 비녀를 빼 주고 호랑이가 데려다 준 좋은 땅에 마을을 만들었다는 동물 보은담이자 지명 유래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삼유리 버들뫼」는 1992년 김경석이 편찬하고 무주군에서 간행한 『내 고장 전설집』의 181~184쪽에 수록되어 있다. 채록 장소와 채록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내용]
조선 태종 조에 유정현(柳廷顯)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 말 정몽주의 무리로 몰려 귀양을 갔다가 조선 시대에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1416년(태종 16)에 영의정까지 지내게 되어 집안을 다시 명문으로 일으켜 세웠다. 유정현의 출사 이후 단종의 숙부 수양 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가 되었다. 1456년(세조 원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등의 모의가 탄로나 여섯 신하가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있었다. 이때 세조는 유정현의 후손들도 사육신 유성원과 같은 문중이라 여기고 귀양을 보냈다. 유정현의 가문은 쇠락하여 옥천 땅에서 빈한하게 살게 되었다.
유씨 일가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글을 읽으며 후일을 준비했고, 한 아이가 유독 총명하여 자라면서 학문에 뜻을 두었다. 옥천 땅에 유배된 지 20여 년이 지나도록 귀양이 풀리지 않았고 아이는 자라 총각이 되었다. 유 총각은 학문에 정진했지만 과거를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 성종,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도록 유씨 가문의 귀양 생활은 계속됐고, 유 총각은 마흔 살이 넘도록 결혼도 못했다. 가문은 더욱 몰락했으며 부모님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유 총각은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자신을 수양할 목적으로 공부를 하며 지냈고, 마을 사람들은 그가 학식이 높아 유 선비라 불렀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 귀양이 풀렸는데 그때는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1506년(중종 원년)이었다. 귀양이 풀렸지만 희망을 잃은 유 선비는 귀양 생활하느라 옥천 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 세상 구경을 할 겸 강원도 금강산, 구월산으로 돌아다녔다. 구월산에서 노닐다가 해가 저문 것을 깨닫고 돌아가려던 유 선비는 호랑이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버드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호랑이를 쫓아보려고 했지만 호랑이는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 선비가 다가가 보니 호랑이의 목구멍에 비녀가 걸려 있었고, 유 선비가 비녀를 빼 주자 호랑이는 유 선비를 등에 태우고 한 곳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호랑이 등에서 잠이 들었던 유 선비가 눈을 뜨고 주위를 보니 작은 움막이 하나 있었다. 그 움막에는 노인과 딸이 살고 있었다. 유 선비가 아침에 일어나 사방을 살펴보니 산세와 물이 좋아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유 선비는 구월산에서 꺾어 온 버드나무 가지를 호랑이가 눕혀 놓았던 곳에 꽂은 후 움막을 지어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노인이 세상을 떠나자 유 선비는 노인의 딸과 혼인하여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땅이 아주 비옥해서 해마다 풍작이었다. 유 선비가 사는 곳에 사람들이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고, 유 선비는 자손들은 물론 사람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그 후 유 선비의 사람됨과 높은 학식을 듣고 사람들이 계속 몰려와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유정현의 14대 손인 유최영의 후손들이 대대로 과거에 급제해 9명의 진사가 나왔고, 효자와 열녀가 많이 나와 ‘사유정(四柳旌)’이라는 정려각을 세우기도 했다.
옛날에 유씨 성을 가진 선비가 정착하여 생긴 마을이라 하여 이 마을을 ‘버들뫼’ 또는 ‘유리(柳里)’라고 부르게 되었고, 유 선비가 구월산에서 버드나무를 꺾어 와 꽂아 두었다 하여 ‘버드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유 선비에 의해 생겼다는 버들뫼는 오늘날 유씨 성을 딴 유야면(柳野面) 또는 유가면(柳加面)으로 불리게 되었고, 행정리의 명칭도 상유(上柳), 중유(中柳), 하유(下柳) 등으로 나뉘어져 삼유리(三柳里)라 불리게 되었다.
[모티프 분석]
「삼유리 버들뫼」의 주요 모티프는 ‘호랑이의 목에 걸린 비녀를 뽑아 준 선비’, ‘명당자리로 은혜 갚은 호랑이’ 등이다. 어떤 사람이 호랑이 목[혹은 발]에 걸린 비녀[가시]를 빼 주고 그 보답으로 명당을 얻게 된다는 명당 발복담과 같은 이야기는 민담이나 전설 형태로 전국에서 전해지고 있다. 호랑이와 같은 맹수도 자신이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삼유리 버들뫼」에서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1337~1392]에서 세조 때의 사육신 사건 등 역사적 사실이 구체적으로 첨가되어 있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몰락한 한 가문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호랑이의 보은 모티프와 결합하여 전개되고 있다.